관계의 모양을 예감하는 맛
연인에게 해 줄 첫 요리로는 오일 파스타가 적당하다. 이건 어디서 들은 것도 읽은 것도 아니라 살면서 어쩌다 터득한 것이다. 일 년 간격으로 세 명의 연인과 세 가지 오일 파스타를 먹었다. 같은 유리 테이블에서 비슷한 식기를 두고 마주 앉아서였다. 단순하면서도 다채로운 맛은 그 관계와 닮아 있었다.
난 지금 오일파스타가 단지 간단하기 때문에 적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올리브유, 면, 마늘, 페페론치노, 치즈, 레몬 정도만 있으면 웬만큼 만들 수 있는 요리이기는 하다. 내가 말하는 건 연인과의 요리라는 낭만적인 그림 이면에 실제 요리 과정의 냄새, 칼질, 타이밍, 협력, 어색함과 내밀함에 대한 것이다. 그 단순한 조리과정 동안 보고 냄새맡고 나누는 것에 그 관계의 단면이 담겨 있다. 각자의 성격과 그 조화, 현실과 이상, 악취와 향미가 모두 있다.
같이 요리해먹자, 요리해줄게, 로 시작된 초대는 꿈꿨던 것과 분명 달리 진행될 것이다. 도마와 칼질, 백허그 같은 것을 생각했다면, 혹은 한 사람이 요리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건너편에서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장면이나, 첫 술을 뜨면서 ‘음식을 통해 너랑 더 가까워졌어‘하는 식의 어떤 이해를 꿈꾼다면, 실제로는 매우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과 마주할 것이다.
왜 오일 파스타인가? 우선 오일 파스타는 도회적이고 특별한 느낌이 있다. 다른 파스타들과 비교하자면 크림 소스의 꾸덕한 유지방이 육체적이고 유아적이며, 붉고 새콤달콤한 토마토 파스타는 계절감이나 가족적인 느낌을 품고 있다면, 오일 파스타는 보다 관념적이고 지성적이다. 투명한 소스, 지방 그 자체의 화학적 특성을 활용하여 만들어지는 이 요리는 어른과 도시인의 맛이라고 할 만하다. 갖추어진 모습으로 만나 신비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연애 초 연인들에게 이 세련된 맛이야말로 적합하다.
그런데 이지적이고 단순한 외양과 달리 오일 파스타는 다양한 신체적 경험을 집약적으로 품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기도 생선도 (앤초비 필레 정도를 제외하면) 들어가지 않은 채로 면과 기름, 일부 향신채만을 가지고 하는 깔끔한 음식이지만, 오일 파스타는 요리의 지극히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측면을 담고 있다. 재료만 손질하고 섞으면 되는 샐러드나 미리 준비해둘 수 있는 스프와 달리 메뉴의 특성상 초대하는 날 지금 이곳에서 요리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과정이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것이다. 주방의 작은 조리대에서 마늘을 까고 편 써는 동안 서로의 살에 밴 마늘 냄새를 맡을 때, 열기와 기름이 얼굴을 벌그레하게 만들 때 우리는 꿈꿨던 것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면수와 버터를 끼얹으며 유화시키는 순간의 긴박한 긴장감은 그다지 관능적이지 않다.
레스토랑이나 바에서의 산뜻한 여유와는 확연히 다른데, 이렇게 재료를 씻고 만지고 썰고 수세미에 세제를 묻히는 생활인의 활동을 할 때 확인되는 것들이 있다. 계획적인지 즉흥적인지, 섬세한지 혹은 투박하고 호방한지, 레시피를 완벽하게 따르려 하는지 혹은 느슨하게 변주를 주는지 등등. 그리고 그 좁은 공간에서 로맨틱한 느낌 없이 붙어 있을 때 몸이 서로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둘 간의 케미스트리의 단면이 느껴진다. 게다가 각자가 요리할 때 보이는 모습에서 평소 이 활동이 삶에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 그러니까 음식을 사먹는지 혹은 해먹는지, 손으로 무언가 만드는 기쁨을 느끼고 노력을 들이는 과정을 즐기는지를 알게 된다.
또한 이 단순한 요리는 혼자 할 수도 같이 할 수도 있다. 이제는 두 사람의 성격과 협력, 팀워크가 문제가 된다. 역할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얼만큼 믿고 맡기는가. 작은 주방에서 서로에게 얼마나 공간을 주며 함께 할 때의 리듬이 어색한지 편안한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마늘을 썰 때 누군가는 재료를 꺼내고, 기름에 향을 낼 때 누군가는 테이블을 세팅하거나 뒷정리를 할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기다리거나 이런 저런 수다를 떨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에게 레몬 관자 파스타를 만들어줄 때 나는 의도치 않게 혼자서 모든 과정을 해나갔는데, 아마 A와 함께 요리하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고 생각했거나 혹은 A가 알아서 무슨 도움을 주기를 바랐기 때문인지 모른다. 나는 완벽한 관자를 굽고 싶어서 그가 오기 한참 전부터 관자의 물기를 빼고 모양을 다듬고 심지어 하나는 미리 구워 적절한 불의 세기와 소금 간의 정도를 가늠했다. 그렇게 재료를 다 준비해두고 A가 들어오자마자 불 앞에서 모든 것을 긴박하게 조합했던 것이다. 그는 “같이 하려는 거 아니었어?” 다소 당황해하면서 그저 앉아서 기다렸고 나는 혼자 어색하게 허둥대었다.
B와의 요리는 사이 좋은 과학자처럼 함께 했는데, 이상하게 요리의 과정이나 그 결과적인 맛에 어떤 미각적 관능성이나 충만함 같은 건 없었다. 수학적인 엄격함과 상호 공존의 느낌만 있었다고 할까. 우리가 시도한 요리는 흑백요리사에서 나온 알리오 올리오였는데, 면을 조리 시간의 반 정도만 익히고 기름에 코팅한 뒤 잔열로 나머지를 익히는 단순하지만 독특한 방법의 요리였다. 나는 내내 레시피 영상을 보고 TV 셰프가 사용한 것과 비슷한 기구가 무엇이 있을까 찬장을 뒤지며 이런 저런 그릇을 꺼내 놓다가 B가 도착하자 우리 둘은 실험실 동료처럼 타이머를 맞추고 베이킹 트레이에 옮긴 면에 기름을 두르고 호일 뚜껑을 입혔다. 완성한 뒤에는 오늘의 실험 결과를 확인하는 사람들처럼 심지가 부드럽게 살아있는 면 한 가닥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감회를 공유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몸 속 깊은 곳까지 기분좋게, 마침내 관능적이게 해 주었던 C의 요리를 떠올린다. 오일 파스타의 면 가닥 가닥이 서로 얽혀 있으면서 씹으면 입 안에서 하나의 쫀득한 덩어리가 되어 삼켜졌다. C는 재료를 아낌 없이 썼는데, 크게 두른 올리브 오일과 마늘, 이탈리안 파슬리가 유기적인 하나가 되어 미각을 풍성히 자극했다. 어쩐지 방탕한 느낌이 드는 이 요리는 일명 ‘스칼렛 요한슨 파스타’로 C가 자신의 시그니처 요리라 하여 만든 것이었다.
재료가 간단한 이 메뉴를 위해 우리는 통마늘을 하나씩 까고 썰었다. 나는 어디선가 배운 포슬포슬한 파슬리 가루 만들기 기법을 활용해 파슬리를 잘게 다졌다. 내가 카운터에 있으면 C는 불 쪽으로 가고, 내가 싱크대에 있으면 그는 카운터로 오고, 투박한 모양으로 잘려나간 재료들을 “딱 적당해” 하고 가져가 불에 올리다 보니 어느 새 음식이 완성되었다.
그 맛에는 신체적 내밀함과 만족감이 존재하는 듯하고 나는 그 요리를 기분 좋게 기억한다. 그저 오일 파스타일 뿐인데, 이 밀도 있는 시간 동안 만들어지는 음식은 방금 지나온 시간의 증거물로써 미묘하지만 편차가 큰 맛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음식은 이 관계의 지금과 미래를 담고 있다. 우리의 요리는 앞을 내다본다. 몸으로, 느낌으로, 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