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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리셋 버튼

by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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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에 들어가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거야.

그리고 예전에 있던 친구들은

싹 다 정리할 거야.”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 겨울날,

고등학교 친구들 앞에서

이런 미친 소리를 했던

기억이 있다.



뭐,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내지른 말은 아니었다.

그날 친구들과 다소 심한 다툼과

서운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운함을 표현하는 말치고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철없는

발언이었다.


내가 마치 소시오패스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저런 말을 내뱉은 뒤

경악하는 친구들의 표정을 보았을 때,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내면이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공허한 사람인지를…



컴퓨터 게임을 하다 보면

진행이 잘되지 않을 때나

또는 무언가 상황이

많이 어그러졌을 때,


리셋 버튼을 꾸욱 누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세상을 살다 보면

아무리 잘해 보려고 노력해도

한번 무너진 인간관계는

다시 회복될 줄을 모른다.


그럴 때는 마치

집 앞 정원의 나뭇가지를 자르듯

싹둑싹둑 가지치기를 하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가지 몇 개 없어져도,

나는 아무렇지 않을 거야.’


‘저 사람은 나에게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단지 스쳐 가는

여러 인연 중에 하나야.’


‘뻗어 있는 저 수많은 나뭇가지 중에

고작 한 개의 가지일 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

그 사람을 잃을까 조마조마했던

내 안의 커다란 두려움도,

내가 모든 것을 망쳤다는

쓰리고 아린 죄책감도,


정수 필터에 걸러지는

투명한 물처럼 깨끗해지면서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진다.




사실 나는 내가

굉장히 좋은 사람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안다.


나는 누구든 쉽게 손을 놓을 수 있는

마음이 텅 빈 깡통 같은 사람,

불쌍하고 공허한 형편없는 사람.



내면이 비어 있는 나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마음에 담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깊이 담은 것처럼,

내가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이렇듯 좋은 사람인 척하는 나 같은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나도 처음부터

이처럼 공허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무서웠을 뿐이다.


내가 마음을 비워 내지 않으면

내 마음이 크게 다치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 안을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비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프다… 피한다…

아프다… 피한다…


오늘도 나는

휘청이는 인간관계 속에서

조용히 내 마음속 리셋 버튼을

누른다.


‘딸칵’


그렇게 다시 한번

다가올 아픔으로부터

도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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