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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세탁

by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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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네 원래 원수 관계 아니야?”


언젠가 WWE를 시청하던 중

프로 레슬링에 문외한인 친구가

황당하다는 듯 내게 물어 왔다.


“아니야, 지금은 또 같은 편이야.”


나는 그 친구에게

이 분야에는 각본이란 것이 있고,

그 각본에 따라 원수도 되었다

동료도 되었다 하는 것이

프로 레슬링의 특징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마치 우리가 흔히 보는

드라마 속의 배우들처럼 말이다.



프로 레슬링이 드라마와

미묘하게 다른 점이란

이곳에도 역시 스토리가 존재하지만,

그 스토리는 매회 이어지는 것이 아닌

단기 시즌제라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프로 레슬링에는

‘기억 세탁’이란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두 명의 선수가 어느 시즌에는

미친 듯이 싸우다가도,

시즌이 바뀌면 금세 또

싸웠던 기억을 잊어버리고

같은 편이 되어 함께 웃으며 어울린다.



참 편리한 것 같다.


프로 레슬링 세계관 안에서는

그 누구도 과거의 관계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단지 현재의 각본 흐름에 맞추어서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 나갈 뿐이다.




이에 반해 우리 현실은 어떠할까.


분명한 것은 프로 레슬링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그렇다.


상대방과의 기분 나빴던 일은

좋았던 일보다 더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이같이 내 안에서 미움의 싹이 커져 가고,

나는 그 사람을 평생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그리 살아가게 된다.



우리네 인생도

저 프로 레슬링 속 사각의 링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잊고 잊히고,

서로에게 케케묵은 앙금과 증오를

마음대로 털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마음 안에서도

프로 레슬링의 각본처럼

기억 세탁이 일어난다면…


나쁜 기억을 세탁기에 넣고

깨끗이 지울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내가 사는

이 각박한 세상도

한 번쯤 살아볼 만한

그런 정겨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프로 레슬링처럼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지만,

기억 세탁이란 편리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이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의

씁쓸한 각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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