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이었다. 이 대표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사무실에 나갔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가 끝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기 전에 가방을 다시 들어서 안쪽 주머니의 지퍼를 열었다.
약 봉지는 그대로 있었다.
그걸 확인하는 것이 이 대표의 아침 루틴이었다. 매일 하는 건 아니었고, 어떤 날만 했다. 어떤 날이 어떤 날인지는 이 대표도 잘 구분이 안 됐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약 봉지를 확인하고 다시 지퍼를 잠그면 가슴이 조금 덜 답답했다. 약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약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아지는 날들이 있었다. 그게 약의 진짜 기능인지도 모르겠다고 이 대표는 가끔 생각했다.
약 봉지는 손바닥만 했다. 흰색 종이 봉투에 의원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봉투 안엔 알프라졸람 0.25밀리그램 10알이 들어 있었다. 작년 가을부터 6개월 동안 이 대표는 이 약을 받아 왔다. 의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오라고 했지만 이 대표는 두 달에 한 번 갔다. 가는 날은 점심시간을 이용했다. 회사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지영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한 사람은 이 대표 자신뿐이었다. 말한다는 건, 그러니까 진료실에서 의사 앞에서 증상을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작년 가을 그날, 이 대표는 강남역 환승 통로에 있었다.
이 대표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다시 재생했다. 처음엔 공포로, 그 다음엔 이해해 보려는 마음으로, 지금은 그냥 사실로. 그날 이 대표는 투자자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미팅은 잘 풀리지 않았다. 투자자는 "지금은 시장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회의실을 나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이 대표는 이미 다음 미팅 리스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강남역 2호선에서 신분당선으로 환승하는 통로였다. 통로는 길었고, 사람이 많았다. 앞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뒤에서 사람들이 밀고, 옆에서 사람들이 지나갔다. 이 대표는 평소처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숨이 얕아지는 게 느껴졌다. 처음엔 그냥 피곤한 건 줄 알았다. 걸음을 늦췄다. 얕아지는 게 더 얕아졌다. 들이마셨는데 공기가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 입을 벌리고 더 크게 들이마시려 했는데, 들이마실수록 더 숨이 없는 것 같았다.
통로 벽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벽이 차가운지 손이 차가운지 구분이 안 됐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이 대표를 흘끗 봤다가 지나갔다. 이 대표는 아무한테도 도움을 청하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한지 아닌지도 몰랐다. 죽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죽기엔 너무 선명한 감각이었다. 죽는다는 건 감각이 없어지는 거여야 하는데, 이건 감각이 너무 많은 거였다.
10분이 지났는지 20분이 지났는지 이 대표는 몰랐다. 숨이 돌아왔을 때 이 대표는 벽에 기댄 채로 땀에 젖어 있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사람들이 여전히 지나갔다. 아무도 이 대표가 방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무도 모른다는 게 이상한 안도였고, 동시에 이상한 외로움이었다.
이 대표는 그날 회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서 한 시간쯤 아무것도 안 했다. 집에 돌아가서 지영에게는 "오늘 좀 피곤하네"라고만 했다. 지영은 "일찍 자요"라고 했고, 이 대표는 그날 11시에 침대에 누웠다. 누웠는데 잠이 안 왔다. 새벽 2시쯤 이 대표는 핸드폰으로 '숨이 안 쉬어질 때'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 옆에 공황장애라는 단어가 떴다. 이 대표는 그 단어를 클릭하지 않고 핸드폰을 엎어놨다. 클릭하는 순간 그게 자기 증상이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이 대표는 회사 근처 작은 신경정신과를 검색했다. 병원 이름은 '마음의원'이었다. 간판이 담담한 게 마음에 들었다. 점심시간에 이 대표는 그 병원에 갔다. 예약 없이 걸어 들어갔다. 접수대의 간호사가 웃으며 맞아줬다. 간호사는 이 대표의 얼굴을 보고 "처음 오셨죠?"라고 물었다. 이 대표는 "네"라고 대답했다. 얼굴에 쓰여 있었구나. 이 대표는 생각했다.
같은 가을, 같은 도시 어딘가에서 지영도 처음으로 자기 병원을 찾고 있었다는 걸 이 대표는 그때 몰랐다. 지영도 이 대표한테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은 계절에 각자의 진료실에 처음 앉았다. 4년 가까이 그 일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줄 모른 채로 있었다.
의사는 40대 초반의 여자였다. 안경을 쓰고 있었다. 책상에는 컴퓨터와 필기용 노트 하나, 그리고 작은 화분 하나. 화분은 살아 있었다. 이 대표 회사의 화분 두 개 중 하나만 살아 있는 것과는 달랐다.
"어떤 일로 오셨어요?"
"어제 지하철에서 숨이 안 쉬어졌어요."
"얼마나요?"
"10분… 20분 정도요."
"처음이에요?"
"네."
의사는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그리고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요즘 잠은 어떤지, 식사는 어떤지, 일은 어떤지. 이 대표는 '일은 어떤지'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 일은 괜찮다고 해야 하는지, 안 괜찮다고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의사는 이 대표의 망설임을 봤다.
"대표님 일 하시죠?"
"…네. 회사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몇 년 되셨어요?"
"9년째요."
"직원은요?"
"15명이요. 그때는."
"그렇군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캐묻지 않았다. 이 대표는 그게 고마웠다. 의사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 대표님 같은 분들 많이 와요. 창업하시는 분들, 중간 관리자분들, 자영업자분들. 숨이 안 쉬어지는 증상은 몸이 마음한테 보내는 신호 같은 거예요.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를 넘었다는 신호."
"그런 건가요."
"네. 그리고 그 신호가 오기 시작하면, 안 들어주면 점점 커져요. 처음엔 지하철에서 한 번, 그 다음엔 회의실에서, 그 다음엔 집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게 돼요."
이 대표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의사가 한 말 중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가장 무서운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으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증상에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는 것은 관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름 없는 증상이 가장 무서웠다.
"약을 조금 드릴게요. 강한 약은 아니고, 숨이 안 쉬어질 것 같을 때 한 알 씩 드시면 돼요. 미리 먹을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가방 안에 늘 가지고 다니세요."
"왜 가지고 다녀요?"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증상이 덜 오는 분들이 많아요. 먹을 수 있다는 안심 자체가 약이 되거든요."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처방전을 출력해 주었다. 이 대표는 그걸 들고 진료실을 나왔다. 나오면서 접수대에 다음 예약을 잡았다. 한 달 뒤 점심시간이었다.
그날부터 이 대표의 가방 안쪽 주머니에 약 봉지가 들어왔다.
6개월 동안 이 대표는 그 약을 몇 번 먹었을까. 정확히 기억했다. 6번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꼴이었다. 가장 최근에 먹은 건 2주 전이었다. 투자자 미팅 직전에 화장실에서 한 알을 먹었다. 약은 20분쯤 뒤에 효과가 왔다. 효과라기보다는, 다가오던 어떤 파도가 잔잔해지는 느낌이었다. 파도가 안 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파도가 왔을 때 그걸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이 대표에게는 전부였다.
의사는 가끔 이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말씀하실 만한 분 있으세요? 가족이나 친구나."
이 대표는 늘 "네,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지영이 있었고, 김 이사가 있었고, 대학 동기 둘이 있었고, 부모님도 있었다. 그런데 의사가 묻는 '말씀하실 만한'은, 사람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이 대표는 그걸 알고 있었지만 매번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없다고 말하면 의사가 뭔가 더 해주려고 할까 봐 무서웠다. 이 대표는 더 이상 추가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에서, 이 대표는 약 봉지를 다시 지퍼 안쪽으로 넣었다. 봉지를 만진 손가락 끝이 조금 축축했다.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이 대표는 손을 티셔츠에 한 번 닦고, 컴퓨터를 켰다.
메일이 27개 와 있었다. 주말에 들어온 메일들이었다. 월요일 아침의 메일함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이 대표는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중부발전 실무자에게서 온 메일이 하나 있었다. 내일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하루 먼저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박 팀장에게 전달해 두면 될 일이었다. 투자자 한 명에게서 온 메일도 있었다. "지난번 미팅에서 논의한 부분, 내부 논의 결과 이번 라운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내용이었다. 놀라지 않았다. 이런 메일이 오면 이제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이 대표가 창업 10년 차에 얻은 것 중 하나였다. 나쁜 소식에 놀라지 않는 능력.
사무실에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9시 20분쯤 김 이사가 들어왔다. 김 이사는 이 대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기 자리로 갔다. 박 팀장은 9시 30분에 들어와서 이 대표 자리로 왔다.
"대표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네, 박 팀장님은요?"
"저도 잘 보냈습니다."
박 팀장은 주말 얘기를 이어 하지 않았다. 이 대표도 안 했다. 서로 '잘 보냈다'고 말한 선에서 주말은 정리됐다. 이 대표의 주말은 서준이와 자전거를 탔고, 부모님 댁에 다녀왔고, 새벽에 몇 번 깼다. 박 팀장의 주말이 어땠는지는 이 대표가 모르는 게 나았다. 상사가 직원의 주말을 너무 구체적으로 알면, 월요일 오전의 업무 지시가 어색해졌다. 이 대표는 그런 거리감을 유지했다. 유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유지해야 한다고 배워서.
"내일 중부발전 프레젠테이션 자료, 오늘 오후까지 보내달라고 왔어요. 박 팀장님이 처리해 주실 수 있죠?"
"네, 오후 3시까지 정리해서 보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박 팀장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 대표는 모니터를 다시 봤다. 메일이 27개에서 26개로 줄어 있었다. 한 개가 더 왔다. 이 대표는 그 한 개를 클릭했다.
발신자는 '최영호'였다. 최 과장이었다. 제목은 '사직 관련 말씀드립니다'였다.
이 대표는 메일을 클릭하지 않았다. 제목만 보고 몇 초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슴이 얕아지는 게 느껴졌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 대표는 가방을 슬쩍 당겨서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약 봉지가 거기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봉지를 한 번 쥐었다. 쥐고 있으니까 숨이 돌아왔다. 아직은 돌아왔다.
이 대표는 손을 빼고 메일을 클릭했다.
대표님, 주말 잘 보내셨는지요. 다름이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 말씀드립니다. 이번 달 말까지 근무하고 퇴사하고자 합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최영호 드림
이 대표는 메일을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네 번째는 읽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월요일 아침의 선릉역 근처 하늘은 흐렸다. 어제 수원에서 돌아올 때는 해가 지고 있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날씨가 바뀌어 있었다.
김 이사 쪽을 한 번 봤다. 김 이사는 이 대표 쪽을 보지 않았다.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김 이사에게 지금 이 메일 얘기를 해야 할지 생각했다. 김 이사는 이 대표에게 세 달 전부터 최 과장 얘기를 했었다. "형, 최 과장 건 말씀하실 때 된 거 같은데요." 이 대표가 미루고 미뤘다. 지난주에 김 이사가 "다음 주까지 결정할게요"라고 이 대표가 말했다. 결정하기 전에 최 과장이 먼저 그만둔다고 말했다. 결정이 필요 없게 된 거였다. 편해진 건가, 이 대표는 생각했다. 편해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복잡해진 것 같았다. 이 대표가 결정했으면 이 대표의 결정이 되지만, 최 과장이 결정하면 최 과장의 결정이 되었다. 회사 안에서 이 대표가 하지 못한 결정이 하나 더 쌓인 셈이었다.
이 대표는 가방 안쪽 주머니에 다시 손을 넣었다. 약 봉지를 한 번 더 쥐었다. 오늘은 먹어야 할까. 먹어야 할 만큼의 일인가. 의사가 말했다. 미리 먹을 필요는 없어요. 이 대표는 손을 빼고 컴퓨터 앞에 그대로 앉았다.
답장을 썼다.
최 과장님, 알겠습니다. 오늘 오후에 잠깐 회의실에서 뵙죠.
전송을 누르기 전에 한 번 더 읽었다. 읽고 전송을 눌렀다.
전송이 끝나고 이 대표는 의자에 기댔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이 두 달째 깜빡이고 있었다. 교체 주문을 미뤘던 형광등이었다. 이 대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형광등 교체를 부탁했다. 관리실 아저씨가 오늘 오후에 올라오겠다고 했다. 이 대표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이 대표는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한 결정 중 처음으로 끝낸 결정이었다. 깜빡이는 형광등을 교체하는 것. 아주 작은 결정이었다. 아주 작은 결정이었지만, 오늘 오전에 이 대표가 끝낸 유일한 일이었다.
가방 안쪽 주머니의 약 봉지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먹지 않았다. 오늘도 먹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지는 오후에 가 봐야 알 거였다. 이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월요일의 하루는 늘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