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투자자

by 이민수

수요일 오후 3시, 역삼동의 한 빌딩 15층이었다. 이 대표는 회의실 유리문 앞에 서서 복도 건너편 창밖을 보고 있었다. 복도 끝에 테라스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서 양복 차림의 남자 두 명이 커피를 들고 웃고 있었다. 무슨 얘긴지는 안 들렸지만 둘 다 편해 보였다. 이 대표는 그 두 사람이 잠깐 부러웠다.

"이 대표님, 들어오시죠."

안내하는 직원이 문을 열었다. 이 대표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테이블 끝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작년에도 만났던 상무, 한 명은 처음 보는 심사역이었다. 상무는 작년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였다. 심사역은 30살쯤 되어 보였고, 노트북을 이미 펴 놓고 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이 대표님."

"네, 오래간만이에요, 상무님."

악수를 했다. 상무의 손은 따뜻했다. 심사역은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 대표는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에서 자료를 꺼냈다. 이번엔 종이로 출력하지 않았다. 태블릿 하나와 링크 하나만 준비했다. 몇 년 전까지는 제본한 자료를 들고 다녔는데, 요즘 투자자들은 종이를 싫어했다. 이런 것도 계속 업데이트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번 이후로 업데이트 좀 부탁드립니다."

상무가 먼저 말했다. 이 대표는 태블릿을 돌려 놨다.

"작년 매출은 28억이었고요, 전년 대비 소폭 감소했습니다. 영업이익은 2억 2천. 3년 연속 흑자 유지했고요."

"매출이 줄었네요."

"네, 대기업 ESG 프로젝트들이 조정되는 기간이라서요."

"조정이요."

상무는 '조정'이라는 단어를 짧게 따라 했다. 이 대표는 그 짧음 안에 담긴 의미를 읽었다. 상무는 조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상무는 시장을 이 대표보다 더 넓게 보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더 아는 걸 상대가 완곡어로 포장할 때, 상무는 그 단어를 짧게 따라 하는 방식으로 자기 판단을 드러냈다. 이 대표도 그런 식의 대화를 많이 해 봤다.

"이번 라운드는 시리즈 B로 생각하시는 거죠?"

"네, 50억 규모로요."

"밸류는요?"

"350억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심사역이 그제서야 노트북에서 고개를 들었다.

"작년 시리즈 A 밸류가 280억이셨죠?"

"네."

"1년 반 만에 350억이시면, 매출은 줄었는데 밸류는 올리시는 거네요."

심사역은 예의를 갖췄지만 문장 속에 바늘이 있었다. 이 대표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이런 질문은 예상했다. 예상했다고 해서 덜 아픈 건 아니었다.

"매출은 단기 조정이고요, 저희가 작년에 중견기업 대상 신규 모듈을 출시했습니다. 그쪽 파이프라인이 올해부터 실적에 반영될 예정이라, 향후 성장 기반은 작년보다 더 넓어졌다고 봅니다."

"파이프라인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요?"

"현재 협의 중인 건수가 12건이고, 그 중 계약 가능성이 높은 건은 5건입니다."

"총 금액으로는요?"

"계약 성사 가정하에 연간 약 8억 정도입니다."

심사역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에 뭔가를 쳤다. 상무는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상무는 숫자보다 이 대표의 얼굴을 더 보는 것 같았다. 상무는 말없이 1분쯤 태블릿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

"네."

"솔직한 얘기 좀 드려도 될까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시장이 탄소 쪽에서 많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우리 펀드도 작년까지는 환경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요즘은 LP들이 안 좋아해요. 성과가 느리니까요. 저희가 이 대표님 회사를 안 좋게 보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개인적으로는 응원하는 회사예요. 그런데 저희 펀드 내에서 환경 섹터에 새로 자금을 배분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는 응원한다'는 말은 '회사 차원에서는 투자하지 않는다'는 말의 완곡어였다. 이 대표는 그 문법도 익숙했다.

"이해합니다."

"이번 라운드 자체를 안 하시는 건 어떠세요? 지금 시장에서 시리즈 B를 밸류 올려서 가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흑자도 나시고 하니까, 내실을 좀 더 다지시고 한두 해 뒤에 더 큰 숫자로 가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 대표는 상무를 봤다. 상무는 이 대표 눈을 피하지 않고 봤다. 상무의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조언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대표가 지금 시리즈 B를 하려는 이유는, 내실이 다져져서가 아니라 운전자금이 빠듯해서였다.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운전자금이 빠듯하다고 말하는 순간 투자자는 돈을 주지 않았다. 필요해 보이지 않는 게 중요했다. 두 달 전 은행에서와 같았다.

"조언 감사합니다. 내부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네, 언제든 편하게 연락 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습니다."

상무는 명함을 다시 한 번 건네지는 않았다. 명함을 또 주는 건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하는 예의였다. 두 번째 만남에는 하지 않았다. 이 대표도 자기 명함을 다시 주지 않았다.

심사역은 노트북을 덮으며 일어섰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내부 검토해서 피드백드릴게요."

'내부 검토'라는 말이 오늘 두 번째 나왔다. 이 대표는 계산했다. 두 번의 '내부 검토'가 있는 미팅의 결과는 거의 항상 같았다. 답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거절이었다.


빌딩에서 나왔을 때 해가 좀 기울어 있었다. 3시 미팅이 길어져서 4시 반쯤 끝난 거였다. 이 대표는 빌딩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가 바뀌는 동안 이 대표는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음악을 틀지는 않았다. 이어폰만 꽂았다. 이어폰을 꽂으면 세상이 조금 멀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귀를 막는다기보다, 혼자 있어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였다.

건너편 횡단보도 끝에 스타벅스가 있었다. 이 대표는 거기 들어가서 아메리카노 하나를 시켰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이 대표가 이번 주에 스타벅스에 앉아 있는 게 두 번째였다. 지난주 은행 미팅 끝나고도 이랬다. 미팅이 끝나면 바로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들이 늘었다. 회사로 돌아가면 사람들이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을 거였고, 이 대표는 또 연기를 해야 했다. 연기 사이에 숨 쉴 틈이 필요했다.

이 대표는 가방에서 약 봉지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냥 가방 지퍼 위에 손을 한 번 올렸다가 뗐다. 약을 먹을 만큼은 아니었다. 약은 파도가 올 때만 먹는 거였다. 오늘은 파도가 아니라 조용한 물이었다. 조용한데 차가운 물. 그건 약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핸드폰을 보다가 이 대표는 카톡 하나를 발견했다. 지영이었다.

여보, 나 오늘 산부인과 갔다 왔어. 호르몬 검사 결과 좀 봐야 한대. 큰 건 아니래.


이 대표는 잠깐 화면을 봤다. 답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잠깐 생각했다.

응 알았어. 저녁에 얘기해 줘.


보내고 나서 이 대표는 자기가 답을 너무 짧게 보냈다는 걸 알았다. 지영이 "큰 건 아니래"라고 한 건, 큰 건일 수도 있는데 말 안 한 거라는 걸 이 대표는 알았다. 알면서도 답을 길게 못 썼다. 미팅 직후의 머리에 다른 사람의 검사 결과를 받아 안을 자리가 없었다. 저녁에 얘기하자고 미뤘다. 미루고 핸드폰을 엎어 놨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김 이사였다.

"형, 미팅 끝났어요?"

"응, 방금."

"어때요?"

"이번은 어려울 거 같아."

김 이사는 잠깐 조용했다. 이 대표는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메리카노가 아직 뜨거웠다.

"형,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오늘?"

"네, 저녁에 맥주나 한잔 어때요."

"왜?"

"그냥요."

이 대표는 김 이사가 '그냥'이라고 말하는 톤을 알았다. 김 이사가 '그냥'이라고 말할 때는 진짜 그냥이 아니었다. 김 이사는 할 얘기가 있을 때 앞에서 '그냥'을 붙이는 사람이었다. 앞에 쿠션을 하나 놓는 거였다. 이 대표도 때로 그렇게 했다.

"어디서 볼까."

"형 회사 근처로 제가 갈게요. 선릉역 근처 그 포차 괜찮죠?"

"응, 좋아. 7시 반 어때."

"7시 반 좋아요."

전화를 끊고 이 대표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놨다. 창밖은 이제 본격적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대표는 퇴근 시간이라는 말을 한동안 안 써봤다. 이 대표는 퇴근이라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회사를 나가고, 밤에 집에 돌아가고, 집에 돌아가서도 메일을 보는 사람. 그건 퇴근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수요일 저녁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원래 그린스텝 김 대표와 약속이 있었다. 지난주에 "솔직히"라고 먼저 말해 준 사람. 그 약속을 이 대표가 지난주에 잡았었다. 이 대표는 약속을 잡았다는 걸 오늘 낮까지 잊고 있었다. 점심 먹으면서 달력을 보다가 생각났다. 김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번 주에 좀 정신이 없어서 다음 주로 미룰 수 있을까요"라고 양해를 구했다. 김 대표는 "네, 당연하죠"라고 했다. 이 대표는 그 '당연하죠' 뒤에 약간의 실망이 섞여 있는 걸 느꼈다. 김 대표도 이 대표처럼 누군가와 '솔직히'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을 테니까.

약속을 미뤄놓고 오늘 저녁에 김 이사와 술을 마시게 됐다. 이 대표는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회사 동료와 술을 마시는 건 업무의 연장이었고, 창업가 동료와 마시는 건 업무와 무관했다. 이 대표는 무관한 쪽의 약속을 미뤘고, 연장인 쪽의 약속을 만들었다. 이 대표는 늘 그랬다. 회사 일이 먼저였다. 이게 옳은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아메리카노를 반쯤 마셨을 때, 이 대표의 머릿속에 아까 상무의 말이 다시 돌아왔다.

시장이 탄소 쪽에서 많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이 대표는 그 문장을 한 번 더 속으로 되감았다. 빠져나가고 있어요. 빠져나가고 있어요. 빠져나가고 있다는 건 '있던 사람들이 나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대표가 5년 전에 이 시장에 들어왔을 때, 이 쪽은 사람이 적었다. 환경, 탄소, ESG 같은 단어를 들고 창업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 드묾이 이 대표의 강점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게 이 대표에게는 시장이 성장한다는 증거였다. 몰려온 사람들이 이제는 빠져나가고 있다. 몰려오는 동안 이 대표는 "이제 관심이 생기는구나" 하고 기뻤고, 빠져나가는 지금 이 대표는 "원래 이 시장은 작았구나"를 다시 배우고 있었다.

남는 사람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시장이 커질 때 들어온 사람들에겐 이 시장이 시장이었고, 시장이 작아질 때 남는 사람들에게 이 시장은 다시 무엇이 될까. 이 대표는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을 때까지 그 질문을 생각했다. 답은 안 나왔다. 답이 안 나와서 대신 속으로 한 문장을 중얼거렸다. 서준이가 했던 말이었다.

체온계도 중요해, 아빠. 열 재야 약 주잖아.

8살의 문장이 44살을 잠깐 일으켰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일으켰다. 이 대표는 잔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7시 반, 선릉역 근처 포차. 김 이사는 먼저 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 이미 녹두전 하나와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김 이사는 이 대표가 들어오자 손을 살짝 들었다.

"형, 왔어요."

"응, 좀 늦었네."

"아니요, 제가 일찍 온 거예요."

이 대표는 맞은편에 앉았다. 김 이사는 소주잔 두 개를 이미 세팅해 놨다. 이 대표가 앉자마자 한 잔을 따라주었다. 이 대표도 김 이사 잔에 따랐다.

"뭐 먹을까요?"

"너 시킨 거 먹으면 돼."

둘은 잔을 부딪치지 않고 동시에 한 모금 마셨다. 김 이사는 자주 그랬다. 잔을 부딪치는 것이 거창해서 좋지 않다고 김 이사가 오래전에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대표는 그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김 이사와 마실 때는 안 부딪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래, 얘기해."

이 대표가 먼저 말했다. 김 이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요."

"너 본론 있잖아."

김 이사는 한 번 더 웃더니 잔을 내려놨다.

"형, 저 잠깐 쉴까 생각 중이에요."

이 대표는 잠깐 멈췄다. 잔을 내려놓지도 않고 들지도 않고, 잠깐 그대로 있었다. 포차 안의 다른 테이블에서 누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생맥주 기계가 거품을 내는 소리도 들렸다.

"잠깐이라고?"

"네, 한 3개월 정도요. 안식월처럼."

"어디 안 좋은 거야?"

"아니요, 건강은 괜찮아요. 근데 요즘 번아웃이 좀… 형도 아시잖아요. 저도 이 회사 5년째인데, 한 번도 진짜 쉬어 본 적이 없어요. 이번에 안 쉬면 안 될 거 같아요."

이 대표는 잔을 들어서 한 번 더 마셨다. 한 번에 다 마셨다. 김 이사가 잔을 채워주었다. 이 대표는 잔을 채워주는 김 이사의 손을 봤다. 김 이사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긴장했구나. 이 대표는 알았다. 5년째 같이 일한 사람이 오늘 이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오래 준비했을까.

"…언제부터?"

"되면, 다음 달부터요. 박 팀장님한테 제가 맡고 있는 기술 쪽 인수인계를 해놓을게요. 제가 없어도 한 3개월은 돌아갈 수 있게 해 놓고 갈게요."

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섭섭한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지만, 몸 안에 무언가가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갈 때의 그 느낌과 비슷했다.

"그래, 쉬어야지."

"형, 괜찮아요?"

"응, 괜찮아."

이번 주 몇 번째 '괜찮아'인지 이 대표는 또 세지 않았다. 세면 안 될 것 같았다.

"형, 저 돌아올 거예요. 정말이에요. 지금 그만두는 게 아니라 잠깐 쉬는 거예요."

"응, 알아."

"근데 형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저도 마음이 복잡했어요. 제가 쉬면 형이 더 힘들 거라는 거 알아서 계속 말을 못 꺼냈어요."

김 이사가 그 말을 할 때 이 대표는 김 이사를 봤다. 김 이사는 울고 있었다. 소주 반 잔에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5년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대표는 고개를 돌렸다. 김 이사가 우는 걸 정면으로 보면 자기도 울 것 같았다. 이 대표는 자기가 우는 걸 오늘 감당할 수 없었다.

"네가 왜 울어."

"모르겠어요, 그냥."

"울지 마. 3개월이면 금방이야."

"네."

김 이사는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 이 대표는 녹두전을 한 조각 집어서 입에 넣었다. 녹두전은 아직 뜨거웠다. 혀 끝이 살짝 데었다. 지난주 스타벅스에서 처음 마신 아메리카노처럼, 오늘의 녹두전도 너무 뜨거웠다. 뜨거운 게 이상하게 반가웠다. 뜨거운 감각은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었다.


포차에서 나왔을 때 9시 반이었다. 이 대표와 김 이사는 선릉역 사거리에서 헤어졌다. 김 이사는 지하철을 탔고, 이 대표는 반대쪽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걷는 동안 이 대표는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다시 얕아질 것 같았다.

정류장에 도착해서 이 대표는 버스를 기다렸다. 전광판에 버스가 도착까지 3분이라고 떠 있었다. 3분 동안 이 대표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투자자에게 답장을 쓸지 말지 고민하다가, 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김 이사 만났어. 쉬고 싶대. 3개월.


지영은 곧바로 답을 보냈다.

여보, 집에 와서 얘기해. 조심히 와.


이 대표는 그 답장을 한참 봤다. '조심히 와'라는 네 글자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무거웠다. 조심히. 이 대표는 조심히 살고 싶었다. 조심히 살면 모든 걸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심히 살수록 자꾸 새어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김 이사가 새어나가는 것처럼, 최 과장이 새어나가는 것처럼, 투자자가 새어나가는 것처럼. 조심히 쥐는데도 자꾸 빠져나가는 것들.

버스가 왔다. 이 대표는 버스에 올랐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창밖으로 수요일 밤의 서울이 지나갔다. 간판들이 많았고, 사람들이 많았고, 택시가 많았다. 이 대표는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 가방 안쪽 주머니에 손을 한 번 넣었다. 약 봉지는 그대로 있었다.

오늘도 먹지 않았다. 먹지 않고 넘어갔다. 그게 오늘의 작은 승리였다. 작은 승리들을 모아서 하루를 견디는 게 요즘 이 대표의 방식이었다. 버스가 집 근처 정류장에 다다를 때까지 이 대표는 창밖만 봤다. 집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영이 기다리고 있을 거였다. 이 대표에게는 그것 하나만 있어도 오늘은 끝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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