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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May 25. 2024

게으른 사랑

무척이나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입니다. 현재 런던은 새벽 6시 30분을 지나고 있어요. 화창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보통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스트레칭을 간단히 하다가 사과 한쪽을 먹기도 하고, 견과류를 씹기도 하면서 아침을 맞이하거든요. 오늘처럼 바로 책상으로 돌진해 글 쓰는 일을 시작한 건 약 삼 주만인 듯해요. 석 달간 (자율적) 매일 마감을 마친 후 처음이니 말입니다. 오후에 홍콩 비행이 있어 이렇게라도 짬을 내어야 토요일의 즐거운 이 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거든요. 오랜만에 느끼는 몽롱한 기분의 글쓰기, 반갑네요.


여름이었다, 봄이었다, 겨울이었다, 다시 여름이다가 뭐 그런 날씨들을 맞으며 한 주가 지나갑니다. 사실 이번 주 전 좀 게을렀어요. 매일 아홉 문단의 초고를 쓰겠다는 다짐을 내려두었거든요. 올 한 해 제 머릿속을 매일 가득 채우고 있는 글쓰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듯 요리보고 조리 보며 어떻게 하면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간들로 가득합니다. 짝사랑을 시작한 듯 애가 타는 거 있죠. 그러다 오 월의 눈부신 초록을 제대로 느낄 여유도 없이 지내는 자신을 바라보며, 한 주만 물러서 보자 하고는 게으른 사랑으로 글쓰기를 바라봤습니다. 


이상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잠시 거리를 둔 것뿐인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마음 저 밑바닥을 채우기 시작하는 불안한 감정의 작은 소용돌이 때문에요. '이래도 되는 걸까?' 며 칠을 쓰지 않고 글 쓰는 일에 멀어졌을 뿐인데 '이러다 사랑하는 사람이 영영 떠나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의 덩어리들이 자리를 채우려 하는 거예요. 어지간한 사랑은 아니구나 싶었죠. 그렇다고 그 사랑에 커다란 에너지를 매일 쏟아 부울 수만은 없잖아요. 그러다 사랑이 금세 식어버리면 어떡해요. 목요일이 되니 심장 주변을 묵직하게 누르는 속삭임이 시작되죠. '빨리 뭐라도 써야 할 것 아니야?' 이 날은 김치전을 부치며 별 것 아니라는 듯 이 말을 무시했어요.


금요일이에요. 날이 좋은 아침, 남편은"첼시에 다녀오는 거 어때?" 하고 제안을 하더군요. "응 그럴까 생각 중이야. 내일 비행 가니까, 외출 잠깐 하고 오지 뭐."라고 대답은 했지만, 결국 동네 스타벅스로 향해 글을 쓰고 앉아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글 쓰기와 게으른 사랑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 이 번 주는 결국 어느 정도의 성공과 그것보다는 큰 실패가 공존하는 시간이었어요. 친구, 지인들과 대화를 나눠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 나누는 말속에도 글쓰기는 언제나 주인공으로 자리하고 있었거든요. 글쓰기와의 밀당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게으른 사랑 따위는 접어두고 마음 내키는 대로 첨벙 뛰어들기로 합니다. 


무심했던 일을 돌아보겠다던 지난 토요일의 글이 무색해집니다. 지금 제가 가장 편안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 글쓰기 하나에 돌진하는 일이야 말로 무심해지지 않는 일이라는 엉뚱한 결말로 흐르는 듯 하니 말이지요. 생각해 보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알고 매진하는 일 또한 삶의 중요한 기술이지 않을까요? 이 번 주 제 주변을 맴돌었던 불안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뒤에 두고 변명을 무기 삼아 게을러질 때 따라오는 감정이지 않았을까요? 현재에 온전히 발을 딛지 않고, 미래에 시선을 두고 지냈던 시간이 보낸 엉뚱한 신호 같은 거 말이에요. 


믿고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를 믿고 가기로 했어요. 시선이 미래에 자꾸 가 닿게 되는 건 의심이 드니까 그렇다는 걸 알았습니다. 게으른 사랑의 틈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의심 말이에요. 사유를 할 때 드는 의심은 더 깊은 생각으로 향하는 열쇠지만, 사랑을 할 때 드는 의심은 후회만 남기는 독약 같은 것이라는 걸 알죠.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해요. 미래에 시선은 거두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온전히 마음을 쏟아요. 자신을 믿고 가는 인생, 캬! (또 혼자 취했네요. 다시 돌아와서) 


네, 게으른 사랑은 이제 거둬두려고요. 새벽부터 이렇게 조곤조곤 수다를 하다 보니 어느덧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남편과 아침을 길게 먹고, 홍콩으로 떠날 채비를 해야 할 시간이에요. 변함없이 공항 카페에 앉아 한 시간은 글을 쓰고 있을 거예요. 이 순간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중 하나가 되어버렸거든요. 일하러 가기 전 설레는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제야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군대 가야 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여인이 사랑의 시작에 고민하던 시간을 뒤로하고 "그래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마음먹고 꽁냥꽁냥 설렘을 맞이하는 것만큼 말입니다. "젠장, 해 보기라도 할걸"이라는 후회만큼 부질없는 게 없잖아요. "그런 짓을 하기도 했지." 하며 웃음 짓기로 해 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에요.

벌써 7시 20분을 향해 가거든요.

이렇게 적어두니 아름답고 귀한 한 주를 보낸 듯싶어요.

잘 지내다 다시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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