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싱가포르에 들렸습니다
인도에서 왔어요
인도에서 싱가포르행 티켓을 산 건 우연이었다. 인도로 들어갈 때, 나가는 티켓이 없으면 입국이 거부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급하게 제일 싼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그렇게 우연과 실수로 가장 싼 싱가포르행 티켓을 구입했다. 순진하게도 나는 가장 싼 티켓을 선택해 가장 비싼 도시로 가게 되었다. 저가 항공이라 포함되지 않았던 수하물 비용을 물고 나서야 눈앞의 작은 이익으로 큰 이익을 놓치는 소탐대실이 바로 이런 상황이구나 생각했다. 싱가포르란 무엇인가.
정말로 비싼 물가
물가가 비싸다고 들었지만 어느 정도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던 나는 유럽 여행을 하면서도 북유럽 말고는 물가에 크게 놀란 적이 없어서 내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 살다 유럽 여행을 간 것과 인도에서 싱가포르에 가는 건 여름에 찬물에 들어가는 것과 겨울에 얼음 물에 들어가는 것 같은 온도차를 느끼게 해주었다.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깔끔하게 정돈된 분위기가 인도에서 온 나를 당황스럽게까지 했다. 바깥으로 나가니 매연 냄새가 나지 않다니! 자동차가 나를 기다려주다니! 여기는 어디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정신없이 호스텔에 도착했다. 인도보다 6배 비싼 호스텔 가격은 들어가자마자 살에 닿는 쾌적한 공기에 바로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같은 가격이면 인도에서는 테라스까지 겸비한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혼자 럭셔리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http://mentalfloss.com/article/536315/these-are-worlds-10-most-expensive-cities
실제로 싱가포르는 물가가 가장 높은 도시였는데 저렴했던 인도 물가에 적응된 나는 더 큰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선택이란 무엇인가
요가
물가가 비싸게 느껴지니 돈을 쓸 때마다 소극적으로 저렴한 걸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게 된다. 인도에 이어서 싱가포르에서도 요가원을 찾아 매일 요가를 할 계획이었다. 싱가포르에 잠시 방문한 여행객인 나는 인도에서 요가원을 찾은 것처럼 검색을 해서 요가원을 찾아 몇 군데를 방문해보았다. 호스텔 근처에 있는 작은 요가원은 운영을 중단한 듯했고 그곳을 제외한 요가원들은 모두 기업형태로 운영되는 큰 요가원이었다. 실제로 싱가포르에 기업형 요가원의 비율이 높은건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전문적으로 운영되는 요가원은 하나같이 멋들어진 인테리어에 경험 많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들게 하는 모든 걸 갖춘 곳들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비쌌다. 싱가포르에 살고 있는 뉴요커였던 친구는 요가 강사 자격증이 있는데 잠시 이직을 하기 위해 일을 쉬고 있는 참이라 요가 클래스를 등록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나는 3박 4일간 요가 클래스를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음식
싱가포르에 도착하고 처음 먹은 점심은 바로 햇반이었다. 인도를 떠나며 함께 지냈던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며 햇반을 주어서 고맙게 받았지만 맛있는 게 너무 많은데 먹을 일이 생길까 하며 배낭에 넣어 두었다. 먹지 않아도 마음을 받은 거라 한국까지 가져갈 생각이었는데 햇반은 언니의 선견지명이 든 선물이었다. 나는 싱가포르에 도착하자마자 햇반으로 맛있는 한 끼를 해결했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제품이었다. 곰국은 뼈를 정성스럽게 오래오래 끓여 진하게 먹어야 제맛이라는 생각에 가루로 된 곰국은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부끄러울 만큼 뜨겁다며 호들갑을 떨며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짐을 풀고 조금 쉬다가 호스텔 근처에 있는 호커 센터를 방문해 저녁을 먹었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를 여행하다 보면 세계 각국의 음식이 뷔페식으로 준비되어 있는 호커센터(Hawker Center)를 쉽게 볼 수 있다. 우리의 푸드코트와 비슷하지만 좀 더 서민적인 분위기며 음식을 주문하면 테이블로 배달해 준다는 차이점이 있다. 중앙에 공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고 그 주변으로 각 호커에서 중국식, 일본식, 인도식, 말레이식 등 여러 종류의 음식을 판다. 메뉴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일반 식당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배낭여행자들도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출처: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978376&cid=48193&categoryId=48297
싱가포르 음식은 아니었지만 호커 센터에서 먹은 중국식 국수는 푸짐하고 맛있어서 만족스러운 저녁이 되어주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져 산책을 하다가 이끌리듯 카페에 들어갔다. 디저트와 차를 주문하고 카페에 있는 잡지를 읽으며 싱가포르도 살만한 곳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영수증을 보고 놀랐다. 10% 세금과 함께 다시 7% 세금이 붙는 게 아닌가!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081164&cid=48531&categoryId=48560
안 그래도 비싼 물가에 세금까지 한몫하니 다시 인도에서 왔다는 걸 실감해야 했다. 맛있게 먹고 시원하게 보낸 시간은 잊은 채 상쾌하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에는 호스텔에서 제공된 조식을 먹었다. 아주 많이. 식빵을 굽고 버터를 두껍게 얹어서 그 위에 잼을 더 두껍게 입혔다. 사발 가득히 우유를 부어 시리얼을 리필해가며 먹었다. 지금 먹어둬야 한다는 원시적 본능이 살아난 것 같은 아침 식사였다. 평소 식빵은 광화문에 있는 천연 발효종으로 구워낸 곳이 맛있다며 일부러 들려서 사 오고 프리미엄 상아 목장 우유만 고집했는데 그건 또 다른 나일뿐 여기에 없었다. 아침을 배불리 먹고 우울해졌다. 그리고 난 전투적인 조식을 마친 후,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아, 배는 고프니 점심과 저녁 시간에는 모두 호커 센터에 갔다. 그렇게 이튿날은 나에게 식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긴 채 지나갔다.
셋 째 날에는 조식을 먹었지만 어제처럼 막무가내로 먹지 않았다. 자기 전, 기름진 호커 센터 음식으로 인해 소화가 되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돈이란 무엇인가를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생각한 덕분이다. 어제의 기분은 흘려보내고 새로운 싱가포르를 경험하고 싶었다. 잠이란 무엇인가. 점심으로 아주 맛있는 파스타를 먹고 싶어졌다. 중국에서부터 가방에만 고이 모셔둔 원피스를 꺼내 입고 노래를 들으며 싱가포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마리나 베이 샌즈를 향해 걸어갔다. 싱가포르 거리도 구경하며 깨끗한 거리를 걷고 있으니 행복했다. 매연과 소음이 가득하고 행인이 다니기에는 위험한 인도 마이소르 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던 행복이다.
물이 만원이라고요?
인도에서 요가를 하며 뉴욕 런던보다 한적한 도시에 살고 싶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싱가포르 거리를 걷고 있으니 나는 다시금 조금은 번잡하면서 자본주의가 돋보이는 상점과 카페가 즐비한 도시가 아직도 좋다는 걸 느꼈다. 싱가포르는 그런 도시였고 내가 좋아할 만했다. 인도와 다르게 걷는 즐거움을 한껏 느끼며 미술관 구경까지 마치니 파스타를 먹어도 될 것 같았다. 호기롭게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파스타 전문점을 발견했다. 다행히 들어가기 전 메뉴를 확인했다. 가격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결국 아래층에 있는 카야 토스트 가게로 향했다. 맛있었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나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아까 먹고 싶었는데 먹지 못한 파스타를 먹기로 했다. 지금 먹지 않으면 싱가포르는 우울한 기억으로 변질될 것 같았다. 난 충분히 행복하게 걷고 즐겼지만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한 기억은 잊히지 않을 테니까. 함께 먹으면 혼자 먹을 때보다 가격에 관대해진다. 이직 중인 그녀와 나는 물 한 병과 파스타를 한 접시씩 주문했다. 식전 빵부터 고소하고 담백해서 파스타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주 요리가 나오고 한 입을 먹는 순간 꼬들꼬들한 면에 잘 스며든 양념이 어우러져 아주 맛있었다. 여기 오길 잘했다. 그런데 영수증을 받아보니 물이 만 원이네!
교통
다행히 싱가포르는 넓지 않다. 걸어서도 중심지끼리 이동이 불편하지 않아 교통비를 아낄 수 있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공항은 지하철로도 편리하고 간편하게 도착할 수 있다. 시내에 숙박을 잡았기 때문에 교통비가 많이 들지 않았다.
돈이란 무엇인가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기회가 많다. 특히 싱가포르 여행을 하면서 돈이 나의 기분 결정권을 상당 부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했다. 날 우울하게 만든 부분은 내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었다. 돈이 없다는 건 그만큼 선택의 폭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선택의 폭이 줄어들면 그만큼 내가 원하는 걸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적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적은 돈으로도 가능하거나 돈으로 사지 않아도 되는 경험일 경우에는 다르지만 물가가 비싼 싱가포르에서 내가 원하는 건 적은 돈으로 불가능했다. 유럽에서 빈털터리가 될 뻔한 위기로 일주일 동안 호스텔에서 제공되는 무료 파스타를 먹으며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싱가포르는 자본주의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도시었다.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고 비싼 게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물가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물가 비싼 도시에서는 돈이 적으면 그만큼 우울하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내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글에서 "자신의 존재 규정을 위협할 만한 특이한 사태가 발생하면, 새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는 문장을 읽고 인도에서 우연히 온 3박 4일간의 싱가포르 여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무엇인가.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809211922005
밥을 먹다가 주변 사람을 긴장시키고 싶은가. 그렇다면 음식을 한가득 입에 물고서 소리 내어 말해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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