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5. 휘뚜루마뚜루 간계밥 인생

: 맛있는 간계밥 인생을 위하여-

by 채움



#1.

간장계란밥, 일명 간계밥.

불을 쓰는 요리 중 이만큼 휘뚜루마뚜루 만들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재료 손질 할 필요 없고, 조리 시간도 짧으며 만들면서 머리 쓸 일도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아침 식사는 찾기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 집 아침밥상 단골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인 셈.


뜨끈한 밥 위에 노릇노릇한 반숙을 올리고, 참기름과 간장을 한 바퀴씩 돌려서 비빈다.

입에 넣자마자 고소+짭짤+촉촉의 삼위일체를 보여준다.


하지만 간단하게 보이는 간계밥도 '진짜 맛있음'을 보여주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1. 밥의 적당한 찰기

2. 완숙과 반숙 그 어딘가에 위치한 노른자

3. 기가 막히게 맛있는 참기름


이 세 가지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져야만 고소하고 담백한, '진짜 맛있는' 간계밥이 완성된다. 즉, 뭐 하나라도 빠지면 간계밥의 존재감도, 맛을 보며 느낄 수 있는 힐링과 위안도 잃게 되는 것이다.


참기름이야 산 넘고 물 건너 찾은 놈으로 커버 칠 수 있다지만, 밥과 계란은 숱한 실패를 벗 삼아야 가능하다.


먼저 밥을 찰지게 짓는 것부터 난관이다.

영혼의 동반자 쿠쿠가 있지만 물을 잘못 맞추면 고두밥이나 죽밥이 된다. 고추장에 고추만 찍어먹을지라도 밥만 맛있으면 망고땡이라는 것을, 밥이 잘 지어진 날에는 엄마가 왜 그리 좋아하셨는지를 신혼 생활 2개월 차에 알아버렸다.


계란도 마찬가지.

이븐 하게 익은 탱글탱글한 노른자를 밥 위에 올리고 싶지만, 타이밍 3초만 삐끗해도 퍽퍽해진다. 마음이 급해져 빨리 꺼내기라도 하는 날이면, 콧물처럼 늘어진 흰자를 마주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불 위에 있는 계란 앞에선 늘 겸손해지는 법이다.


간계밥은 휘뚜루마뚜루 되는 것 같아 보여도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해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다면 대충 허기나 때우며 퍽퍽한 하루를 시작하게 만든다.




#2.

요즘 우리의 삶도 간계밥 같다.

굳이 모양새를 따지자면 떡이 된 간계밥이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남편은 기말고사와 생기부 기록 등으로 정신이 없고, 나는 여전히 육아와 집안일을 하며 혼이 빠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신 좀 붙잡고 살자'는 말을 꺼내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 밥을 먹이고, 일을 하러 나가고, 낮잠을 재운다.

그리고 저녁 8시 무렵, 아이를 재우고 육퇴를 하면 두 사람 다 넋이 빠져서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그 모습은 마치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 나오는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는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할 시간도, 힘도, 여유도 없다는 것.


우리는 자주 깜빡거리고, 자꾸 허둥댄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는데, 그 생각마저도 안 하고 사는 요즘이다.

그저 침대에 누워 잠이 든 전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무사히 버텼구나' 할 뿐이다.




#3.

먹는 둥 마는 둥 한 간계밥, 휘뚜루마뚜루한 인생.

덜컹이는 기차에 몸을 싣고 짜인 일정표대로 움직이며 지리한 나날을 보내길 몇 날 며칠.


이렇게 떡이 된 간계밥으로 대충 허기나 때우며 살고 싶지는 않다.

고소하고 촉촉한 맛이 빠졌다면, 버터든 조미김이든 김치든 치트키가 될 만한 것들을 함께 곁들여야 한다.

바삭거리다 못해 파삭 마른 잎처럼 되고 싶지 않은 자들의 최후의 발악이자 최선의 용기랄까.


그래서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는 짬짬이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가끔은 함께 영화도 보고, 또 어떤 날은 가보지 못한 여행지를 향한 계획을 세워 주저리주저리 서로에게 읊는다.

그저 '하루가 하루답게'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에 진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시답잖은 농담들부터 던지며 머릿속을 가볍게 비워낸다.


간계밥 만들기 경지에 오른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간계밥 말고, 우리도 참기름 한 방울씩 더해보자."


대충 휘휘 비비며 살아도 어찌어찌 굴러가긴 하지만, 그 속에 고소함 하나, 온기 한 스푼 없으면 삶은 퍽퍽할 것이다. 맛있는 간계밥이 되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기름칠을 하고 있다.

휘뚜루마뚜루해도, 기름칠 한 방울이 있다면 살 맛 날 테니까.


인생을 '맛있게' 사는 법을 통달하기에 아직은 모자라고 서툴지만 어떻게든 오늘을 조금 더 근사하게 보내려고 한다. 쫄깃한 밥알처럼 탄력 있게, 탱글탱글한 노른자처럼 버석해지지 않게.


조금 더 반짝이는 날을 위하여.

조금 더 맛있어질 인생을 위하여.




keyword
이전 25화#24. 복을 전달하는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