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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움 Dec 17. 2024

[번외] 팔척귀신과 찐따부모

: 왜요, 부모도 사람인 걸요.



육아를 하는 것이 매번 힘들고 고된 것만은 아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면서, 함께 놀아주면서, 목욕을 하면서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사건들이 발생한다. 아이를 재우고 육퇴를 한 그 순간에도 말이다.




#1.

정신없이 바빴던 한 주가 지나가고 주말이 돌아왔다.

옛날 같았으면 11,12시에 어기적거리며 침대에서 나왔겠지만,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이다.

아이는 아침 일찍부터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배치기+옹알이 콤보를 시전 하였다. 입면 하자마자 30분 단위로 초반깸을 하다가 새벽 3시부터는 한 시간 단위로 깨던 아이 치고는 상태가 너무 밝고 행복해 보였다.

반면 우리 부부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저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푸석푸석한 피부,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등이 지난밤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하게 만들 뿐이었다.



생후 5개월, 우리는 드디어 수면교육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수면의식은 잘 잡혀있던 아이였으나 4개월 원더윅스를 시작으로 초반깸, 새벽깸, 종달기상까지 하게 되니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진정시키고 잠을 잘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였다.

우리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홈캠을 켜놓고 혹시라도 아이가 도중에 깨서 울 경우, 10분 정도는 나가지 않고 기다려보기로 손가락 약속을 걸며 의욕을 다졌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말아줬음 싶고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금요일 저녁, 아이를 재우고 육퇴에 들어간 시간. 비장함이 감도는 밤이었다.

남편은 지필평가와 수행평가 마무리로 정신없이 보냈던 주간이라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나 역시 짜증이 부쩍 많아진 아이와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던 남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외줄 타기를 하느라 배터리가 방전돼 있었다.


가만히 앉아 멍 때릴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며칠 전부터 볼까 말까로 고민하던 <조명가게>가 떠올랐다.

음습한 분위기와 소재 때문에 혼자 보기 무서워 몇 번을 고사하던 드라마였다. 한지에 물이 번지는 것처럼 장면 장면이 갑작스럽게 떠올라 육아에 지장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옆에서 같이 멍을 때리던 남편에게 sos를 쳤고, 우리는 불멍을 하듯 모니터를 바라보며 캐릭터에 얽힌 스토리에 몰입하게 되었다.


- 생각보다 괜찮네, 그렇게 무섭지는 않은데?

- 그러게, 웹툰보고 이거 보니까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오히려 슬퍼.


우리는 호기롭게 캐릭터와 상황을 분석하며 조용히 낄낄거렸다.

팔척귀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2.

드라마가 중반부에 접어들자 분위기는 어둡게 바뀌었고, 난데없이 등장한 팔척귀신으로 남편은 갑자기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 왜 왜 뭔데, 팔척귀신 뭔데, 키 왜 이렇게 커?

- 팔척귀신 몰라? 중고등학교 때 도시괴담 안 들어봤어? 키 엄청 큰 귀신!

- 키가 크다고? 얼마나 큰데?

- 아파트 12-13층 높이만 해. 그것보다 더 클 수도 있어. 아니 이걸 왜 모르냐고! 기다려봐 사진 보여줄게.


검색창을 뒤지다가, 사진을 보다가, 도시괴담을 읊어주다가. 두 부부는 정신사나움의 끝을 보여주며 참으로 조잡하고 산만하게 드라마를 시청하였다. 아마도 무서움을 가리기 위한 나름의 필사적인 노력들이 아니었을까.

  


그때였다.

빼액- 하는 비명과 함께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어떡해.. 쟤 깼어. 빨리 가봐.

- 아 무서워 오빠가 갔다 와, 내가 아까 재웠잖아.

- 나도 무서운데.. 아씨.. 그럼 같이 가줘.


아이의 양질의 수면을 위해 10분을 참자던 우리의 굳은 결의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이가 우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 니가 갈래 내가 가리를 외치며 드라마 괜히 봤다고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팔척귀신은 왜 나와가지고 마루도 못 나가게 만드냐고 구시렁거리며 발 뒤꿈치를 세우고 방문을 함께 나서는 두 부부의 모습이 어찌나 웃기고 짠하던지!


아이를 재우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내 빵 터지고 말았다.

"이러기야? 진짜 팔척귀신 나타나면 어쩌려고 그래."

간신히 다시 재운 아이가 깰까 봐 자체 음소거 웃음으로 깔깔거리던 우리는 그야말로 찌질하고 찐따스러웠다. 하지만 묘하게 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3.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할 '육아 공동체'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팔척귀신 때문에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물거품이 된 것이라면 "오히려 좋아!"를 외치고 싶은 밤이었다.

찌질함과 찐따스러움이 '부모'라는 견고하고 숭고한 성을 한순간에 박살 낸 순간.


부모는 어떤 순간에도 의연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니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부모라면-

부모니까-


학생들 앞에서도 빛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부모는 오죽할까. 하지만 약간은 모자라고 어딘가 어설픈, 때로는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은 철딱서니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귀가 불에 데인 것 처럼 뜨거운 순간도 오겠지. 오히려 그런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니까 말이다.

아이는 어떨까. 그들은 성장하면서 나의 부모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던 슈퍼맨&슈퍼우먼이 매번 멋있을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슬프지만 현실이 그렇다.


우리는 육아 과정에서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치고 어이없는 실수를 하게된다. 완벽할 것 같던 내가, 나의 동반자가 이렇게나 실수투성이 사고뭉치, 손이 많이 가는 큰아들&큰딸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벌려놓은 일들을 수습하며 반성을 하고 천천히 부모의 모습으로 다듬어나간다. 아이 또한 그런 모습을 보며 함께 성장할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적인 희생과 봉사, 모든 일에 의연하고 슈퍼히어로 같아야 된다는 생각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다만, 찌질하고 찐따 같은 순간을 아이에게 들키는 날이 오더라도 낯 뜨거워지게 피하지는 말기를.

오히려 지금처럼 깔깔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기를, 그게 잘못된것인지 대차게 되물으며 긴긴밤 간지러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한다.



왜, 뭐, 엄마, 아빠도 사람인데 팔척귀신 무서울 수 있지. 안 그러냐?!  





*그래서 다음날 아침 뭐 먹었냐고요? 얼큰하게 라면 끓여 먹었습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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