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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김치죽과 투캅스

: 콤비플레이는 오늘도 계속된다.

by 채움


#1.

아이가 잠든 야심한 밤, 요즘 우리 부부는 <투캅스> 시리즈에 푹 빠져 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띄운 짧은 클립 하나를 보고 피식 웃던 어느 날, "안 봤으면 같이 보자"는 남편의 말에 혹해 보기 시작한 게 벌써 일주일째다.


<투캅스>는 부패 경찰 조 형사와 원칙주의 강 형사가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 한 팀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영화다. 90년대 서울 골목의 정서, 환장하는 콤비플레이,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슬랩스틱 몸개그와 날것 그대로의 대사까지.

요즘 보기 드문 'B급 감성'이 우리 부부를 홀렸다.


B급 감성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은 연신

- 이거 진짜 웃기지?

라며 만족스러워했고(얼마나 많이 본 건지 다음 대사까지 외우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던 나는 어느 순간 두 형사의 골 때리는 콤비에 완전히 빠져버리고 말았다.


화면 속 두 형사는 매일 티격태격하다가도 결국 한 팀이 된다.

딱 우리 같았다.

성격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고, 심지어 먹는 속도도 다르지만, 아이 하나 키우며 하루를 버티는 지금 이 삶 자체가 '콤비 플레이'다.


낮에는 육아와 학교 업무로 전력투구하고, 밤이 되면 조용히 컴퓨터 방으로 출동한다. 아이가 깰까 봐 살금살금 주전부리를 꺼내고, 맥주를 따고 <투캅스> 한 편을 플레이한다.


피곤해도 이 시간을 놓치긴 아쉬운 마음,

그것이 우리를 한 팀으로 만든다.




#2.

요즘 박형사(남편)가 많이 지쳐 보인다.

학기말마다 있는 일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반복되는 야근과 늦어지는 퇴근, 그리고 퇴근길엔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꾸 꺼낸다.


"오늘은 칼퇴"라고 했던 말이 플러그였을까.

벌써 4일째, 저녁 늦게 귀가 중이다.

그 말인즉슨, 나의 독박육아도 4일째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옷을 갈아입으면 곧 밤잠을 자게 된다는 걸 귀신같이 아는 아이는, 옷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도망 다닌다.

자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아빠를 보지 못하고 자는 것이 싫은 것인지. 자기 방을 시작으로 거실까지 돌아다니는 아이의 뒤를 쫓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 있었다.


사실 홀로 독박육아를 하고 하루를 마감하는 것은 힘은 들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나가자', '간다'는 말에 신발을 주섬주섬 꺼내 문 앞에서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를 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이에게 지금의 엄마, 아빠는 세상의 전부일 텐데, 하루 종일 '아빠'를 외치는 모습이 짠해 죽겠다.


설거지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 사건 사고가 없을 수야 있겠나.

하지만 교사도 사람인지라 늘 중간에 낀 박형사만 쥐 잡듯 몰리는 것은 안타깝고 서럽다.


집에 와서도 박형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지금 그가 풀고 있는 건 매듭이 아니라, 한 명의 인생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오해인 것 같다.


문제가 반복되는 아이는 결국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우리 애는 안 그래요.' 하던 부모님도 막상 일이 닥치면 쉽게 말을 잇지 못한다. 답답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교사도, 부모도 지쳐가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박형사의 체력은 날이 갈수록 바닥을 치고 있다.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마음은 무겁고, 그 와중에 육아는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 한 그릇 아닐까.




#3.

오늘의 특식은 김치죽.

한 끼 식사이자, 한숨 돌릴 수 있는 작은 구멍이다.

고기는 아니지만 아침에 한 그릇 먹고 가면 몸도, 마음도 든든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익은 묵은지를 들기름과 함께 달달 볶고, 보리새우를 넣은 육수와 밥, 콩나물을 넣어 푹 끓인다.

국간장과 참치액젓으로 간을 맞추고, 마지막엔 참기름과 깨를 뿌리면 완성이다.

김치죽은 재료도 단순하고, 만드는 법도 어렵지 않지만, 완성된 맛은 늘 묵직하고 깊어 진가를 발휘한다.


- 나 어제 울었다?

- 응? 언제? 운 거 못 봤는데?

- 퇴근하기 전에 너랑 통화하다가.. 그냥 갑자기 눈물이 났어.


뜨거운 죽을 후후 불며 후루룩 넘기는 박형사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지만, 그 목소리 뒤로 얼마나 많은 한숨이 지나갔을까 싶다.

최근 통화기록을 보여주며, 모르는 번호가 이만큼이나 떴다고 멋쩍게 웃는 그를 보는데 마음이 시큰하다.


이틀 전, 퇴근하고 돌아온 그는 아이를 안으며 말했다.

- 아, 힘든데.. 행복하네. 이게 행복이구나.


퇴근길 우산을 들고 마중 나오는 아내,

서툰 발음으로 "아빠"하며 와락 안기는 아이,

자기 전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투캅스 한 편,

그것들이 지금의 그를 버티게 한다.


<투캅스> 시리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생활극도 마찬가지다.

여름방학이고 뭐고, 사건 사고는 계속 터질 테지만.

괜찮다. 아니, 사실 괜찮아지길 바란다.


우리에겐 서로를 지켜주는 콤비가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김치죽 한 그릇이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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