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3.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by 채움



비빔밥은 늘 기분 좋은 요리다.

혼자 먹어도 맛있지만, 둘이 먹으면 더 맛있다. 재료도 마찬가지. 아무 재료나 넣어도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이라면 그 한 그릇은 제법 완성된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오늘처럼 내가 좀 비어 있을 때면, 이런 한 그릇이 힘이 된다. 내 안에 흩어진 마음들도, 이렇게 다시 모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친정 부모님이 오랜만에 놀러 오셨다.

바리바리 싸 오신 나물 덕분에 그날 저녁, 우리는 배가 터지도록 비빔밥을 해 먹었다.


그런데 비빔밥 귀신이라도 씐 걸까.

어디가 허하고 아쉬웠는지, 그날 이후로 2~3일 동안은 아침마다 나물을 꺼내어 비빔밥을 만들어 먹고 있다. 그것도 있는 재료, 없는 재료 다 긁어모아 꽉꽉-.

시간이 없고, 귀찮고, 힘들다는 이유로 냉장고 속에서 숨만 쉬던 재료 한 두 개를 꺼내 비벼 먹던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첫날은 고추장 대신 된장찌개를 섞어 만든 비빔밥,

둘째 날은 매콤하게 고추장만 넣은 비빔밥,

셋째 날은 계란프라이까지 얹어 야무지게.



비빔밥 중독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사진을 보니 또 먹고 싶다.



그릇이 넘칠 정도로 꽉 채워진 비빔밥은 아이러니하게도 ‘덜어냄의 미학, 미니멀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함께 따라다니던 고전적인 문장 "Less is more"까지.

건축가 Mies van der Rohe가 했던 이 말은 미니멀리즘 미학의 대표적인 정신으로 꼽힌다. 단순함 속에 본질을 남기고, 불필요한 장식을 덜어냄으로써 오히려 감각과 의미의 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참 좋은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미니멀하게, 단순하게, 가볍게 살아야 한다는 조언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나는, 나를 덜어내기보다 다시 채워야 할 때인 것 같다.


육아를 하며 비워낸 시간, 소진된 마음, 잠 못 잔 밤들..

그것들을 되찾기 위해 나는 마치 비빔밥에 홀린 사람처럼, 몇 날 며칠 동안 '가득' 채운 비빔밥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채운다는 행위는 단지 배를 채우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공백을 메우는 일이었다.

그 한 끼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치 아침의 주유소 같았다. 비빔밥 재료에 담긴 복잡한 맛이 위로가 되었고, 다양한 식감이 나를 붙들었다. 마음도, 기운도, 그리고 삶의 감각도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텅 빈 느낌이 들 때야 비로소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다. ‘허하고 아쉬웠던’ 감각은 아마도 무의식 속에서 ‘나를 다시 들여다 보라’는 신호였을 것이다. 나에게 ‘무(無)’는 더 이상 피해야 할 공백이 아니라, 존재를 다시 채우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덜어내기 전에 먼저 채워야 할 때가 있다.

비우면 가벼워진다지만, 때로는 그 묵직함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 이번 주 아침으로 먹은 비빔밥들은 내게 그런 무게였다.


비빔밥 한 그릇을 다 먹고, 나는 내 삶을 다시 가꾸려는 출발점 앞에 섰다. 어쩌면 재료들을 꽉꽉 담은 비빔밥 그릇 하나가 나를 살렸는지도 모른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25화#52. 방학이라 낭만을 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