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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삶도 국물처럼 진하게 우러날 수 있다면.

by 채움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죽은 아내를 붙잡고 울부짖던 김첨지가 떠오른다.

이상하리만치 운수가 좋았던 날.


나 역시 김첨지만큼이나 운수 좋은 아침을 보냈다.

하지만 나는 말 그대로 진짜 '운수가 좋은 날'이었다.

무려 1년 만에 설렁탕을 먹었으니 말이다.

뽀얀 설렁탕 국물이 가득 들어간 뚝배기를 앞에 두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나를 비워왔는지 알게 되었다. 차 안에서 잠이 든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기다림으로 우러난 것들은 어쩌면 더 진한 맛이 날지도 모른다고.






#1.

아이의 돌접종을 위해 병원에 갔으나, 약간의 미열이 있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주사도 맞지 않았는데 집에 오는 길은 세 사람 모두 기력 소진 상태였다.


긴장이 풀린 걸까.

아이는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직 낮잠을 잘 시간도 아니거니와,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눕힌다고 하더라도 다시 잠들 수 있을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바로 돌아갈까, 아니면 잠든 아이와 함께 정처 없이 드라이브를 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우리는 20분 거리의 김밥집으로 향했다. 김밥을 포장해 차 안에서 간단히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합친다면 대충 한 시간 남짓. 어영부영 비비면 아이의 수면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밥집을 향해 달리는 길, 창 밖으로 수많은 해장국 집과 국밥집이 스쳐 지나간다. 그 그림자들이 아쉬워 나는 국밥집이 보일 때마다 놓치지 않고 예찬을 늘어놓는다.


- 오.. 저 집 설렁탕 맛있지! 출산하고 1년 넘게 못 먹었잖아. 지금은 순댓국, 설렁탕, 양평해장국이 제일 먹고 싶어.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네

- 갈래?

- 어딜? 저길?

- 응, 설렁탕. 내가 애 보고 있을게. 차 안에서 잠들었으니 깨우기도 뭐 하잖아. 가서 한 그릇 먹고 와~!


나는 있는 힘껏 손사래를 치며 안 간다고 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설렁탕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머리와는 따로 노는 마음. 이걸 어쩌란 말인가.

차 안에서 곤히 잠든 아이와 남편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차창 너머로 그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뜨끈한 국물 한 숟갈에 오랜만에 숨 돌릴 틈이 생겼다.


출산 후 1년 넘게 먹지 못했던 국밥이었다. 뜨끈한 국물이 간절했지만, 아이와 함께 외식하는 일은 항상 조심스러워 뜨거운 국물집은 발길을 끊은 지 오래였다. 그 담백하고 녹진한 국물 맛을 오늘, 다시 맛보는 것이다. 그것도 1년 만에!




#2.



설렁탕이 나오고 국물 한 숟갈을 떠먹었다.

뜨끈한 국물이 오장육부를 데워주고, 지친 몸을 달래주는 기분이었다.


평소 국밥집에 가면, '국물 한 입>김치에 밥 싸 먹기(국밥집 김치는 칼칼하니 양념이 잘 베여있어 밥에 싸 먹기 좋다)>밥 따로, 국물 따로 먹기'의 루틴을 따르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국물 한 숟갈을 떠먹자마자 바로 밥을 말기 시작했던 것이다. 설렁탕 국물이 자작하게 밥에 스며들 즈음, 김치와 깍두기, 오징어 젓갈을 올려 한 입씩 먹었다.

입 안 가득 고깃국물의 고소함과 김치의 짭짤함이 퍼졌다.


15분? 20분? 얼마나 지난 걸까.

정신없이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남은 국물까지 원샷을 했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라는 표현이 딱이었다. 차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마음에 걸려 조급해진 탓도 있지만, 1년 만에 마주한 설렁탕의 깊은 맛 때문이기도 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오직 음식의 맛에만 집중한 적이 최근에 있었던가.

주변에는 칭얼대는 아이도, 피곤에 찌든 남편도 없었다. 오직 설렁탕 한 그릇과 나만 있을 뿐이었다.


밥을 다 먹고 흥에 겨워 차로 돌아오는 나를 보고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 1년 넘게 못 먹다가 먹은 국밥인데 얼마나 맛있었겠어.


나는 남편에게 설렁탕의 국물 맛을 온몸으로 묘사했다. 입에 쩍쩍 붙는 그 진한 맛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이럴 줄 알았으면 특대로 시킬걸 그랬어" 하는 호기로운 말도 덧붙였다.




#3.

오래 기다린 것들은 왜 이리도 애틋하고 다정한지. 국물 한 숟갈에 마음이 놓이고, 고기 한 점에 지난 1년의 시간이 스며든다. 그래서 더 쉽게 잊히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때로는 먹는 순간보다 기다린 시간이 더 깊이 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내 삶도 제법 진하게 우러났나 보다. 그 시간들이, 허기들이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에 모두 녹아 있었다.


남편과 조용히 수다를 떨며 집에 오는 길, 잠이 든 아이를 보며 소원(所願)했다.

오래 끓인 끝에 깊어진 설렁탕의 맛처럼, 다가올 나의 날들도 천천히, 묵직하게 익어가기를. 조급하지 않게, 성급하지 않게, 진하게 우러날 수 있기를.

삶이란 결국, 그런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진한 국물 한 그릇과도 같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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