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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27. 2023

'오늘 날짜' 입력해 달라고 했더니 생긴 일

  01.


  회사마다 바쁜 시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무실은 최근 한 달 동안이 그랬다. 그리고 나는 작년 같은 시즌보다 조금 더 바쁘게 보냈다. 올해부터는 여러 사람들의 자료를 받아 취합하는 업무까지 맡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이미 시즌 종료한 뒤에도 나는 그들이 준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일주일을 더 강행군해야 했었다.


© israelandrxde, 출처 Unsplash


  사실 자료 취합은 아직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통상 내 위의 팀장이 자료 종합을 하고 부서장에게 보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삭빠른 팀장 놈 아니, 팀장님은 내가 승진한 걸 핑계 삼아 일을 맡아주길 바랐다. 쉽게 말해서 팀장이 자기 업무 하나를 떼어 내서 내게 던진 것이다.


  - 한 계급 올라갔으니 이 정도 업무는 할 수 있는 레벨이 되겠죠?


  '레벨 안된다고 하면 안 해도 되나?'


  은근히 자존심까지 건드리는 표현에 '그러겠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팀장의 사람 다루는 방법이겠지. 그러나 상사가 대놓고 하라고 지시를 한다 해도 내가 별 수 있었겠나. 하라면 해야지.




  02.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남의 자료를 받아 종합하는 일은 피곤하다. 차라리 내 담당 업무 1~2개를 더 맡는 게 낫다. 취합이 어려운 이유는 업무 난도가 높아서라기보다는 순전히 사람 탓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로 인한 오류도 있을 것이고, 사람마다 작업방식이 다르다 보니 양식 통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삶의 방식이 있구나.

  여러 사람들이 보내온 자료를 보면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담당자들에게 메일에 첨부된 엑셀 시트에 '오늘 날짜'를 입력해서 회신해 달라고 했다고 해보자. 다음은 실제로 그렇게 지시한 뒤, 내가 받은 자료에 입력된 데이터이다.


2023년9월27일
'23년9월27일
2023-9-27
23-9-27
'23-9-27
'23-9-27.
20230927
23.9.27.
23. 9. 27.
23.9.28.(오타)
공란(입력 안 함)
© GeeW, 출처 Pixabay
귀관은 이 경직된 조직에서 보여준
너희들의 자유분방함에 반했다..!



  03.

  

  나는 그렇게 10여 명이 보내준 각양각색의 '오늘 날짜'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 phammi, 출처 Unsplash
오늘 날짜를
여러분 만의 방식대로
다양하게 표현해 보세요.

  나는 결코 그런 콘테스트를 하겠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걸 실제로 봤을 땐 웃음부터 나왔다. 물론 헛웃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단 1명도 양식이 겹치질 않니?'


  통상 회사에서 업무 할 때 쓰는 날짜 양식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중구난방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본격적인 데이터 검증은 하기도 전에 이런 자잘한 것부터 정리를 해야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04.


  - 왜 이걸 혼자 붙들고 있어? 담당들한테 시켜.


  얄미운 팀장이 지나가다가 훈수질을 했다. 기한에 임박해서도 자료를 못주는 나를 보고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는 것이다.


  '누가 그걸 할 줄 몰라서 그런 줄 아나?'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는 아마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짓거리를 하기 싫어서 나에게 일을 던졌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부아가 치미는 걸 참고 입을 열었다.


  - 담당들한테 시켜서 받은 게 이거예요.


  - 정말이야? 이 사람들 진짜 안 되겠네. 다시 전달해서 수정해 달라고 해. 이거 원래 오늘까지였던 거 알지?


  - 다시 해달라고 해봤자 '지시한 업무 × 담당자 수'만큼 일이 늘어납니다. 그냥 제가 해서 드릴게요.


  - 그래, 그럼 그러든지. 역시 우리 서 과장님밖에 없다니까. 잘 부탁해요.


  팀장은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사라진다. 남들 안 시키고 내가 다 하는 이유는 그냥 내가 하는 게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기한 내에 자료를 넘기려면 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돈 받는 처지에 나만 더 일하고 싶어 환장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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