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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 Sep 14. 2023

직장 회식에 아이를 데려오라고요?

  01.


  과장님,
저 어떻게 해야 돼요?

  오늘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여직원이 다짜고짜 나를 붙들고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2년 전, 우리 부서에 발령이 난 뒤 약 2개월 뒤 출산 휴가와 동시에 육아휴직을 나갔다. 그런 터라 다른 직원은 물론 나와도 친분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실제로 우리 사무실에 누군가가 복직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의 이름은커녕 존재 자체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복도에 서서 그녀의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내내 복도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는지 납득이 되었다.



© desrecits, 출처 Unsplash


  결국 문제는 오늘 저녁에 예정된 '사무실 회식'이었다.


  그리고 그 회식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녀'였다. 육아휴직을 나갔다가 복직을 한 그녀를 위해 사무실에서 복직기념(!) 회식을 잡은 것이다. 회식이 즐거울 사람이라고 해봤자 집에 가봤자 할 일 없는 사람, 정치질에 능한 사람, 그저 술자리가 좋은 사람 말고 누가 있겠냐마는 이런 명분의 회식 정도는 참석해 주는 게 사회생활을 위해 편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02.


  허나 그녀에게는 그조차도 참석 못할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정시에 퇴근을 하자마자 유치원으로 아이 픽업을 가야 했고, 맞벌이 주말부부라서 저녁시간에 아이 봐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오늘 자기 이름 걸고 하는 회식소식을 들었고, 초면인 부서원들과 부서장에게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복도에 나와 친정 식구들에게 전화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나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른 상황에서 누군가 나에게 그런 의견을 물으면 '회식 따위보다 개인사정부터 우선 챙겨라'라고 조언하는 쪽이지만 이번 건은 사정이 좀 달랐다.


  - 어떡하죠? 웬만하면 신경 쓰지 말고 안 와도 된다고 할 텐데 이건 통 답이 없네. 내가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 저희 부서장님 성격은 어떠세요? 이런 행사에 사람 빠지는 거 싫어하시죠?


  - 글쎄요. 하지만 부서장님 성격을 떠나서 단 한 사람이 주인공인 자리인데, 그 사람이 빠지면 그림은 확실히 이상해질 것 같네요. 정말 어떡하지.


  - 알겠습니다. 아이 봐줄 사람 없는지 조금 더 알아볼 수밖에요.

 

© john_tuesday, 출처 Unsplash

  그녀는 또다시 휴대폰 속 연락처 목록을 살피며 탕비실로 향했다.


  

  

  03.


  회식에 아이 데리고 와요!
나 애 잘 봐요!

  퇴근 시각이 다가올 무렵, 그녀의 딱한 사정이 사무실에 퍼졌고 그걸 들은 오지랖 넓은 김 과장이 선뜻 손을 들었다. 그 '끔찍한 제안'을 한 김 과장을 다독일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김 과장은 나보다 몇 살 많지도 않으면서 하는 말만 들어보면 의식 수준 차이는 좀 과장해서 아버지와 아들뻘이다. 나는 그녀를 위해 이거라도 정리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김 과장님, 지금 농담이 아니라 진짜 답이 없는 상황이에요.


  - 어허, 나도 농담 아니야. 나 진짜 애 잘 봐. 애들은 재밌게 해 주면 그걸로 끝이거든. 걱정 말고 데리고 와요.


  물론 선한 의도였겠으나 김 과장의 진심 어린 헛소리가 계속되자 여직원은 거의 울상이 되었다. 끝내 아이 봐줄 사람을 찾지 못한 그녀는 진짜 회식 때 아이를 데려가든지, 자기 이름이 걸린 첫 전입 회식을 퇴짜 놓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비록 선의라고는 하더라도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좋은 것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은 맹모 노릇은 못할지언정 말이 좋아 회식 자리지 아저씨들 술판에 내 아이를 데려가다니.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도 못할 짓이다. 특히나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에게 고기 굽는 연기랑 냄새 가득한 곳에 머물게 한다는 것도 찝찝한 일이다.




  04.

아이,
데리고 오세요.


  결국 이 얘기를 전해 들은 부서장이 사무실에 나와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아니, 지시했다고 하는 게 맞을까? 나는 두 귀를 의심했다.


  - 회식도 업무의 연장인데 이런 날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죠. 걱정 말고 아이 데려오도록 해요.


  부서장은 '다 이해한다, 이제 해결되었냐'는 듯한 인자한 표정으로 그런 무자비한 멘트를 담담하게 읊었다. 그때 여직원의 표정을 미처 확인하진 못했지만 나 같으면 그냥 울음을 터트리고 회식에서 빠졌을 것 같다. 어쩌면 그녀는 이렇게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 차라리 편했으려나? 부서장의 시선은 김 과장으로 옮겨갔다.


  - 김 과장님, 정말 믿습니다. 오늘 회식은 김 과장님에게 달려 있어요.


  -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이 보는 것만큼은 자신 있습니다.



© sebastiancoman, 출처 Unsplash


  그 정신 나간 대화가 오가고 난 뒤, 그녀는 회식자리에 정말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는 걱정했던 것보다 적응을 잘했고, 몇몇 취한 아저씨들로부터 용돈을 받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렇게 고비를 넘기게 되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05.


  다음 날 전해 듣기로는 그녀는 회식날 펑펑 울었다고 한다. 회식자리에서 그녀는 일과시간에 했던 걱정따윈 잊고 즐거운 듯 보였지만,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동안 그리고 아이를 데리고 회식장소로 향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고.


  회사에 다니다보면 이런 일들이 심심찮게 생긴다. 평소 무감각하게 지내다가 이런 일들을 직간접적으로 겪고 나면 내가 다니는 직장이라는 곳이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라는 사실에 몸서리치게 된다. '육아는 오토' 라고 철석같이 믿는 남자 선배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건 글러 먹은 일이고,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여자 선배들도 '예전에 비하면 복지가 얼마나 잘 돼있냐'며 눈을 흘기기도 한다.


  그런 것이 회사가 우리에게 돈을 주는 이유라고들 한다. 흔히 월급은 그런 눈칫밥, 설움 값이라고 하지 않나. 처음엔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를 쳤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뭔가 걸리는 게 있다. 가령 설사 그게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해야한단 말인가' 하는 반감이 드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이렇다할 답은 없다. 그렇기에 견디지 못하고 휴직계를 내며 뛰쳐나온 것이고, 한편으로는 퇴직까지는 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회사를 떠나고 싶지만 버릴 수도 없는 웃픈 현실인 것이다.


  어쩌겠는가. 울어야지.


© fan11,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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