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서 칼로 찔렀다
그리고 한 명 이상의 전우들이 언급했다시피 히틀러는 색다른 동료였다. 다른 병사들의 경우와는 매우 다르게 집에서 편지나 선물이 오는 경우가 없었다. 또 휴가나 외박을 결코 신청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전투를 치른 병사들이 흔히 그러하던 것처럼 여자들에 대해 가지는 흥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코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해 투덜거리지 않았고, 이것은 평범한 인간들 중에 가장 용감한 자라도 하는 것이었는데, 히틀러는 별종이었다. 불만을 가질 만한 요소는 많았다. 오물, 들끓는 이, 진흙, 악취, 그리고 전선까지. 히틀러는 간절할 만큼 열정적인 전사였고, 전쟁의 목표와 독일의 명백한 운명에 관해서는 언제든지 극도로 진지했다.
"우리는 모두 그 작자를 저주했고, 도저히 참아줄 수 없다고 여겼다."
히틀러와 같은 중대에서 복무했던 남자들 중 하나가 이후에 회상했다.
"이 하얀색 까마귀는 우리가 이 빌어먹을 전쟁 같은 건 지옥에나 꺼지라고 저주를 퍼부었을 때도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그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는 히틀러를 이렇게 묘사했다.
"자신의 머리를 양 손 사이에 잡고, 우리 일당들의 한 구석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메뚜기가 뛰듯 벌떡 일어나더니, 너무 흥분한 상태로 막 달리면서 말했다. 우리의 큰 대포들의 포격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민의 보이지 않는 적들은 적의 가장 큰 포탄보다 더 큰 위험이기에 승리할 수 없다."
그 때문에 히틀러는 이 "보이지 않는 적들" - 유태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에게 독설에 가득찬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든 사악함의 원천이라고 비엔나에서 배우지 않았던가?
그리고 전쟁 중반에 요양하면서 다리 부상으로부터 회복되는 동안 히틀러는 이 점을 조국 독일에서는 사실 보지 않았던 것이다. 베를린 근처의 비엘리츠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 히틀러는 수도를 방문했고 뮌헨으로 갔다. 히틀러가 발견한 모든 "악당들"은 전쟁을 저주했고, 빠른 종전을 소망 했다.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국가의 요구에도 태만한 자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들이 누구였던가? 유태인이라고?
"사무실들은 유태인들로 가득차 있었다. 거의 모든 점원이 유태인이었고 거의 모든 유태인이 점원이었다... 1916-1917년의 기간에 거의 모든 생산이 유태인 자본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유태인은 국가 전체를 강탈했고, 그 국가를 자신의 지배 아래에 두어 억압했다.. 나는 대재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공포에 가득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히틀러는 자신이 본 것을 참을 수 없었고, 자기 말에 따르면 전선으로 되돌아 와서 기뻤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에 자신이 자신이 사랑하던 조국에 닥쳤던 재난을 하물며 더욱 참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히틀러에게는, 그리고 거의 모든 독일인들에게는, 이 재난은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이었고 너무 부당해서 자신들이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독일 제국 육군은 전장에서 아직 패배하지 않았었다. 이것은 내부에 있던 배신자가 찌른 칼에 의해서 등 뒤에서 찔린 것이었다.
그래서 히틀러에게는, 그리고 많은 독일인에게는, "등 뒤에서 칼로 찔렀다" 라고 하는 전설과도 같은 광신적인 믿음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전쟁으로 제국이 해체되고 새로이 들어서게 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기반을 약하키는 것이 되었고, 히틀러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해서 그 앞에 고속도로를 건설해 주는 격이 되었다. 사실 이러한 전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완전한 사기라고 할 수 있었다. 독일 제국 육군 최고 사령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실제 사령관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였고, 루덴도르프 장군은 참모차장 겸 군수총감이었으나, 힌덴부르크 원수가 고령으로 노쇠한 탓에 실질적으로 루덴도르프 장군이 지도하고 있었다 - 역주) 루덴도르프 장군은 1918년 9월 28일에 정전 협정은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장군의 명목상의 상관인 폰 힌덴부르크 육군 원수는 루덴도르프 장군의 이런 견해를 지지했다.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주재한 10월 2일 베를린 황궁에서의 회의에서 힌덴부르크는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는 최고 사령부의 이 요구를 반복해서 제기했다. 원수에 의하면, "육군은 48시간을 기다릴 수 없다."
같은 날 힌덴부르크 원수가 쓴 편지에서는 군사적인 상황은 "싸움을 그만하는 것"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무미건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등 뒤에서 칼로 찔렀다"와 같은 내용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에야 독일의 전쟁 영웅은 그 신화에 한 내용을 기입했다. 전쟁이 끝난 지 일 년이 지난 후인 1919년 11월 18일의 국회 청문회 전에 질문을 받고 힌덴부르크는 선언했다.
"한 영국 장군이 매우 진실 되게 말했소. 독일 육군은 '등 뒤에서 칼로 찔렸다' 고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