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일당들이 음모를 꾸미다
카르, 로소브 그리고 자이서는 제크트가 경고장을 공표한 이후 처음 결심했던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파괴할 지도 모르는 헛된 제스처를 취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11월 6일 이 세 명의 바이에른 삼두는 히틀러가 정치적 인물로서 이끌고 있는 캄프분트에게 통보했다. 즉 자신들은 느닷없이 행동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며 언제 그리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자신들 홀로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히틀러에게 자신이 스스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신호였다.
이제 히틀러에게는 등뒤를 맡기고 홀로 폭동을 수행할 수 있는 지원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원래 바이에른 주, 육군과 경찰의 지원을 가졌어야만 할 것이었다. - 이것이 지난 날 비엔나에서 거지처럼 지내던 동안 배웠던 교훈이었다. 어떻게든 히틀러로서는 카르, 로소브와 자이서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서 함께 행동에 나서야만 하는 위치로 몰아 넣어야만 할 것이었다. 대담함, 심지어 무모함이 히틀러가 이제 그 심장 속에 가지고 있었다고 판명되고 그런 것을 가진 남자로 불려질 것이었다.
히틀러는 이 삼두를 유괴해서 그들이 자신의 요청에 권력을 사용하도록 강요하기로 결심했다. 이 아이디어는 러시아에서 온 난민 두 사람, 즉 로젠베르크와 쇼이브너- 처음 히틀러에게 제기했다. 이 중 후자는 자신의 부인의 이름을 받아서 자기 자신을 귀족으로 만들었고 스스로를 막스 에르빈 폰 쇼이브너-리히터 라고 불렀다. 저렇게 거창하게 이름을 만들긴 했지만 사실 그다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수상쩍은 인물로 로젠베르크처럼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러시아의 발틱 해 근처 지역들에서 보냈다. 전쟁이 난 이후에는 다른 많은 난민들처럼 소련에서 뮌헨까지 길을 찾아 왔고, 바로 이곳에서 나치 당에 가입하고 히틀러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11월 4일 독일의 현충일 (토텐게덴크타그) 에 뮌헨의 중심부에서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인기있는 루프레흐트 황태자 뿐만 아니라 카르, 로소브 그리고 자이서가 펠트헤른할레로부터 이어지는 좁은 거리의 연단에서 군대의 경례를 받을 예정이라고 기자단에게 발표되어 있었다.
쇼이브너-리히터와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수백 명의 돌격대원들이 트럭들로 운송되어 올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들은 거리행진을 할 군대가 도착하기보다 먼저 도착해서 그 작은 거리에 모여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을 기관총을 설치해서 봉쇄할 것이었다. 히틀러는 그러면 연단을 설치하고는 혁명을 선언할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권총을 들이대고 그 유명 인사들에게 자신에게 함류하고 이번 거사를 이끄는 것을 도와달라고 설득할 것이었다.
이 계획은 히틀러에게 상당히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고, 히틀러는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예정되어진 바로 그 날 로젠베르크가 정찰을 할 목적으로 일찍 그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로젠베르크는 잘 무장을 갖춘 경찰이 거대한 규모로 동원되어 그 좁을 거리를 완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낙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음모, 자신들에게는 "혁명"이었던 그것은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낙담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거사는 단순히 연기된 것에 불과했다. 두 번째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전략적으로 정해진 위치에 배치되어 있는 경찰대의 존재로 인해 방해받거나 좌절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11월 10일과 11일 사이의 밤, S.A.와 캄프분트의 다른 무장 조직들은 뮌헨의 바로 복쪽에 있는 프로에트마닝거 헤아트에 모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증오스럽고 수치스러운 정전협정의 기념일인 11일의 아침에 도시로 행진할 것이었고, 국가 혁명을 선언하고 주저하고 있는 카르, 로소브 그리고 자이서에게 기정 사실을 들이밀 것이었다.
이 시점에 와서는 히틀러가 그 계획을 포기하고 새로이 다른 것을 고안해 낸다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취재 기자단에게는 뮌헨의 몇몇 기업들의 요청에 의해서 카르가 도시의 남동쪽 교외에 있는 큰 맥주홀인 부에르게브로이켈러에서 모임이 있고 거기에서 연설을 할 것이라는 짧은 통지가 주어졌다.
연설을 하기로 되어진 날짜는 11월 8일의 저녁 시간이었다. 국가 감찰관의 연설 주제는, 공지에서 말하기를, 바이에른 정부의 경제 프로그램에 관해서가 될 것이었다. 폰 로소브 장군과 자이서 대령과 또 다른 바이에른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참석할 것이었다.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서 히틀러는 그렇게나 급작스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첫 번째는 히틀러의 의심 때문이었는데, 즉 혹시나 카르가 모임이 개최된다는 것을 이용해서 바이에른의 독립을 선포하고 바이마르 왕좌에 비텔스바흐 가를 복위시키기로 할 수 도 있다는 것이었다. 11월 8일 하루 내내 히틀러는 카르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
이렇게 하면서 9시까지 히틀러는 분주하기만 했고 결국 성과는 없었다. 이렇게 되자 나치 지도자의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히틀러로서는 카르가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미연에 방지해야만 했다.
또한 두 번째는 히틀러가 11월 4일에 놓쳤던 기회를 이번에 부에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리는 모임이 제공해 주었다는 점이다. 삼두의 이 세 명을 권총으로 위협할 수 있는 지점에 묶어둘 수 있는 기회였다. 세 명을 위협하여 나치당이 혁명을 수행하는 것에 참여하도록 강요할 것이었다.
히틀러는 즉각 행동하도록 결심했다. 11월 10일의 동원에 대한 계획은 취소되었다. 돌격대는 시급하게 그 큰 비어홀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