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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오생 May 12. 2024

물풀 같은 바람이 나의 등을 두드리고

오서하 <감은사지 기행> 낭송 감상

청나라 문인들의 낭송 이론을 간추려 소개합니다. 


삼라만상의 본질은 소리로 두드려봐야만 아는 법.

문학 작품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낭송을 통해야만 그 본질을 알게 된다.


작가는 반드시 자신의 정서를 독자에게 소리로 전달해야만 하고, 

독자는 낭송 시에 발생하는 소리에 근거하여 작가의 정서를 추적해야만 한다. (以聲傳情, 因聲求情)



오서하 작가님의 <감은사지 기행>. 

눈으로 볼 때와 소리 내어 낭송할 때. 차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경주 감은사는 신라의 천년 고찰입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인근 바다의 대왕암에 묻혀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켜주겠노라 유언으로 약속했다죠.

그 아들 신문왕이 그 은혜에 감사하여 감은사를 지어 호국 사찰로 삼았다죠. 

'호국護國'이란 말 뒤에는 전쟁과 살육, 피와 눈물이 숨어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임진왜란 때 감은사는 잿더미가 되어 지금은 겨우 두 개의 탑만이 살아남았으니까요.


그 뿐일까요. 

또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저마다의 각기 다른 사연으로 이 절을 찾아와 피눈물을 흘렸을까요.

아마도 거기에 작가님 개인의 뼈저린 정서가 더해졌겠지요. 

거기에 저의 사연, 그리고 우리 모든 작가님들의 이런저런 아픔과 슬픔도 함께 얹어봅니다.


천 년에 걸친 우리 모든 이들의 슬픔과 아픔. 눈물과 한숨... 


소리로 낭송할 때 비로소 천년 한恨의 깊이를 가슴으로 영혼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리로 낭송할 때 우리의 등을 두드려주는 물풀 같은 바람으로 위로와 치유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소리로 낭송할 때 그 아픔과 눈물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 아름다운 진주로 빛날 수 있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감동을 선물해주신 오서하 작가님께 깊이 깊이 감사 드립니다. 

작가님의 이 작품을 낭송할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낭송할 때의 배경 음악은 김수철의 <천년학>입니다. 

낭송 감상을 하시기 전에 먼저 어떤 내용인지 살펴봐주시면 감상에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이 작품의 낭송 감상은 좀 더 나중에 천천히 발행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5. 12)이 작가님 귀 빠진 날이시라네요? 오서하, <생일> 참고. 
다른 글과 순서를 바꾸어, 부족한 저의 낭송 감상을 작가님 생일 선물로 드리고자 합니다. 

오서하 작가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감은사지 기행>,  오서하



L


감은사지에 도착했을 때,

까마귀 저녁 길을 울어 넘고 있었습니다.

석공은 휘적휘적 일어나 서글픈 무늬 되어 사라지고

붉은 강은 꼬리 치며 휘돌았습니다.


헐거워진 바람이 열고 나는 터

질그릇 같은 무덤 안을 서성였을 때

물길 따라 황룡이 돌아오는 듯

소리 없는 예불 붉게 붉게 펄럭였습니다.



L


상상해보세요

세월의 흔적을

내가 당신의 흔적을 찾는 이유입니다.


나는 누구의 발걸음으로 여기 왔는지

나는 누구의 얼굴로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당신은 여기와 거기 어디쯤에 존재하는지


산그늘 경계를 넘어서고 난 뒤부터 나는 속병이 도져

쓰러질 듯 어지러웠고 헛구역질이 심하였습니다.

― 등 좀 두드려 주세요. 대왕님.

    해풍에 뭉개진 어깨를 주물러 드릴게요.

빈터에 주저앉아 중얼거렸습니다. 


살아남은 탑 둘,

물풀 같은 바람이 나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감은사지 기행> 시: 오서하. 낭송: 소오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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