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정심誠意正心'은 '감성적感性的 차원'의 공부 방법이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우선 알아두셔야 할 기초 상식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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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격물'과 '치지'가 둘로 구분될 수 있는 게 아니듯, '성의'와 '정심'도 마찬가지다. 둘인 듯 하나이고, 하나인 듯 둘이다. 특히 인간 내면세계의 그 어떤 경지를 표현하는 어휘인 만큼 선후를 따질 수도 없고 엄격한 경계선도 없다.
'격물치지'와 '성의정심'도 마찬가지다. 둘인 듯 하나이고, 하나인 듯 둘이다. 시간의 선후를 따질 수 없다. 늘 '성의정심'으로 '격물치지' 해야 하고, '격물치지'로 '성의정심'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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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동아시아의 '학문'은 공부의 목적과 방법이 서양학과 크게 다르다.
첫째, 서양학은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였고,
'학문'은 '지혜'를 탐구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다.
둘째, 더 큰 차이가 있다. 서양학에는 '감성적 차원'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이라는 단계의 공부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동아시아의 '학문'에서는 '성의정심'의 공부가 핵심 중의 핵심이다. '수신修身'이라는 자기완성의 절반 이상이 '성의정심'에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처한 모든 문제는 이 '성의정심'의 교육을 하지 못한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성의정심'의 교육을 시행할 때, 대한민국은 비로소 희망이 보인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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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성의정심誠意正心이란 무슨 뜻인가?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면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로 잡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만 이야기하자니 너무 추상적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볼 수는 없을까? 인간 내면의 감성적인 표현이니만큼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다. 소오생 버전으로 음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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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년 간 브런치에 글을 올리다 보니 '성의정심'에 대해 여기저기 조금씩 언급했던 대목이 있다. 여기에 퍼올 것은 퍼오고, 고칠 것은 고쳐서 종합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부 중복된 부분은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성실 & 정성
'성誠'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첫 번째는 '성실함'이다. '진실함'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성실함/진실함'은 어디에서 올까?
'믿음 信'에서 온다.
'믿음'은 어디에서 올까? '언어'와 '실천'에서 온다.
예로부터 동아시아의 지성인들에게는 금과옥조로 삼는 말이 있었다.
▶ 군자일언중천금 君子一言重千金
지성인의 한마디 말은 천금처럼 무거워야 한다.
▶ 군자일낙천금 君子一諾千金
지성인이 한 번 승낙한 말은 천금과 같다.
▶ 군자일언, 사마난추. 君子一言, 駟馬難追。
지성인이 내뱉은 한마디 말은 네 마리 말로도 쫓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한다. 유가 사상을 왜곡한 남존여비의 전제주의 유교 패러다임이다. 원래는 '남아 男兒'가 아니라 '군자', 즉 '지성인'을 의미했다. 동아시아의 패러다임은 원래 일원론이므로 남/녀를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성실함/진실함'은 자신이 구사한 언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언어를 신중하게 구사해야 하고, 한번 밖으로 내뱉은 말은 최선을 다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게 동아시아 지성인 세계에서의 기본 철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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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물론 사람 사는 세상이니 100%란 있을 수 없다. 자신이 했던 말이라고 해서 반 드 시, 기 필 코, 꼭 지켜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모종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지성인은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둘째, '성실함/진실함'의 첫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아 스스로 성실하다고 인정될 때만큼 큰 즐거움은 없다. 反身而誠, 樂莫大焉。" 《맹자孟子 진심盡心》자기 자신에게 성실/진실할 때 타인에게도 성실/진실할 수 있는 법이다.
'성誠'의 두 번째 의미는 '정성 精誠'이다.
이 단어는 《장자莊子 어부漁父》에 제일 먼저 등장한다.
'참됨'은 지극한 정성을 뜻한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眞者, 精誠之至也。
不精不誠, 不能動人。
'정성'은 하늘도 감동시키고, 금석金石도 쪼갠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애매하고 모호하다. '정성'의 구체적인 실체는 무엇일까?
현대 한국어로 풀이하자면 '간절함'과 '꾸준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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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오생은 '간절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왕년에 최전방 DMZ 안에서 근무할 때 즐겨 불렀던 <전선야곡>이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유호가 작사한 이 노래는 2절의 가사가 기가 막히다.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을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아아아아아아아 쓸어안고 싶었소
바로 여기 등장하는 '정안수'라는 단어가 '간절함'의 감성을 촉발시켜 준다.
'정안수'의 표준어는 '정화수 井華水/ 井花水'.
이른 새벽에 맨 처음 길어 올린 우물물을 말하는데, 명나라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에서 처음 언급한 단어다. 허준이《동의보감》에서 언급했을 정도로 최상급의 물로 인정받아 약이나 차를 달이는 데 사용하거나, 조왕신竈王神(부엌신)에게 가족의 안녕을 비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정화수'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간절함'의 상징이 된 것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중국대륙 여기저기 수없이 싸돌아다닌 소오생 나름대로 생각해 보니... 중국인들은 아무리 간절한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최고급 '정화수'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화수 중에서도 최고의 정화수는 깊은 산속의 맑은 샘물이다. 그런데 중국 문화의 주류인 황하 문명의 토양은 싯누런 황토가 대부분이다. 황토에 뚫은 우물은 탁월한 필터 효과를 지니고 있지만, 심산유곡의 맑은 샘물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은 70% 이상이 화강암이 많은 노년기 산악 지형 아닌가. 도처에 심산유곡이니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좋은 정화수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꼭두새벽에 일어나 깊은 산속 약수터에 올라가서 남들에 앞서 맨 처음으로 맑은 약수를 길어왔다. 하루에 기회는 딱 한 번! 반드시 남들보다 먼저 맨 처음으로 정화수를 떠야 한다.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할머니 어머니는 그 정화수를 길어와서 그 앞에 무릎 꿇고 조아려 앉아 두 손 싹싹 비비면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를 한다.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할까? 위의 노래 가사에서는 "아들(손주)의 공을 빈다"라고 한다. '공功'이라니, 적을 많이 사살하여 일계급 특진하기를 바란다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또 다른 버전의 가사에서는 "아들의 명을 빈다"라고 한다. '명命'이 무엇인가? '목숨'이다. 우리 아들 우리 손자, 제발 살려달라고 두 손 싹싹 빌면서 기도를 하는 거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짐작이 가시겠죠? 그 마음이 바로 곧 '간절함'이다.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 간절한 마음이 무엇인지 느껴보자. 유명한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다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 <고지전>에서 앳된 신병이 부르는 '간절함'을 마음의 귀로 들어보자.
그런데 그 기도의 행위가 하루이틀 하다가 중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고도 '간절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꾸준함'이 없는 '간절함'은 '간절함'이 아니다.
겸허함 & 치열함
'정성'이란 '간절함'과 '꾸준함'이다.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겸허함'과 '치열함'이다.
'겸허함'이란 무엇인가?
'작아지는 것'이다.
《예기禮記 · 학기學記》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배우고 난 연후에야, 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된다.
學, 然後知不足. (학, 연후지부족)
유학 시절 큰 위로를 얻은 말이다. 석사에서 박사로 올라갈수록 나는 정말 아는 게 없구나, 자괴감이 점점 더 커졌다. 그때마다 이 말을 떠올리며 좌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래,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나마 조금 배웠다는 증거일 거야. 합리화를 하면서.
나중에는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은 아닐까.작아지는 것, 그게 배움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마음이 작아지면 공손해진다. 겸허해지고 간절해지고 정성을 다하게 된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 길에 구르는 돌멩이 뒤에도 숨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아져서 정화수를 떠 놓고 치성을 드렸다.
기독교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작아져서, 가난한 마음으로 자복하며 통곡하라 한다. 불가에서는 백척간두 진일보! 아예 아찔한 절벽에서 허공에 몸을 던져 아상을 죽이고 텅 빈 마음만 남겨놓으라 한다. 유가에서 말하는 ‘성의정심 誠意正心’ 역시 마찬가지다. 겸허해지는 것, 작아지는 것이 핵심이다.
옛날 동아시아의 지성인들은 진리와 학문의 세계를 드높은 산과 끝없는 망망대해로 비유했다. 이 엄청난 절대 가치의 세계 앞에서 그들은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겸허한 마음으로 공손히 몸을 굽혀 예를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진정한 ‘예禮’다.
'예'는 겉으로 인사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무궁무진한 진리와 학문의 세계 앞에 겸허하게 몸을 굽히고, 간절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산길을 오르고 학문의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이 진정한 '예'의 뜻이다. 그러므로 '예'란 바로 곧 '학문'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
모두에서 인용했던 당나라 한유韓愈의 시 구절을 다시 한번 음미해 보자.
드높은 서적書籍의 산길은
꾸준하게 오르는 작은 오솔길
가없는 학문學問의 바다는
각고의 노력으로 배를 띄워라
書山有路勤爲徑,
學海無涯苦作舟。
한유는 그 산길을 '부지런할 근勤'으로 올라가라 말한다. 그 바다를 항해할 배를 '괴로울 고苦'로 만들라고 한다. 꾸준하게 산을 올라가고, 각고의 노력으로 배를 만들라는 말이다. 바꿔 말한다면 간절함과 꾸준함, 치열함으로 학문의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는 이야기.
그 간절함과 꾸준함, 치열함으로 학문의 여행길에 오른 존재를 우리는 '학생'이라고 부른다.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하듯이, 학생에게 나이는 불문不問이다. 열다섯스물 아니라 팔십 구십 노인도 간절함과 꾸준함, 치열함만 있다면 누구라도, 언제라도, 학생이 될 수 있다.
동아시아의 '학문'에는 오로지 '학생'만 존재할 뿐, '스승'이 따로 없다. 이 세상 모든 존재가 스승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절함 꾸준함 치열함으로 이 세상 모든 존재를 스승으로 모시는 '학생'이야말로 우리들 삶의 여행길의 참된 주인공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간절하게 꾸준하게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곳이 바로 곧 정상인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들의 이 학문 여행길은 드디어 대미를 고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반고의 천지 창조 & 싱클레어와아프락사스
중국에는 반고盤古의 천지 창조 신화가 있다.
두 가지 놀랍고 신기한 점이 있다.
(1) 현대 우주과학의 빅뱅 이론과 대단히 유사하다.
(2)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패러다임과 대단히 유사하다.
먼저 아래 그림을 보면서 반고 천지창조 신화의 얼개를 살펴보자.
알 속에서 혼수상태(그림 1, 2)로 지내던 반고는 어느 순간 도끼로 알을 깨고(파괴) 세상에 나온다.(그림 3) 파괴의 순간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었다. 그가 떠받친 알껍데기의 절반은 하늘이 되고 절반은 땅이 된다.
반고는 엄청난 속도로 무럭무럭 키가 큰다. 우주는 그만큼 넓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반고는 자신을 희생하여 삼라만상을 창조한다.(그림 4) 왼쪽 눈은 해가, 오른쪽 눈은 달이 된다. 눈물은 별이, 땀은 호수가, 피는 강물이, 털은 초목이, 호흡은 바람이 된다.(그림 5)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Abraxas).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알 속의 세계에서 안주하던 어린 싱클레어는 사춘기 시절 치열한 투쟁으로 알을 깨고 바깥 세계로 탈출한다. 그리고 커다란 새가 되어 아프락사스라는 신비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힘차게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데미안》의 ‘알 깨기 패러다임’과 ‘파괴가 곧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라는 컨셉은 반고의 천지창조와 동일한 모티브다. 싱클레어가 ‘나’를 찾아 길을 떠나는 성장 과정이라는 것도 유가와 불가의 패러다임과 놀랄 만큼 닮아있다. 헤르만 헤세는 동아시아적 생각의 틀에서 창작의 영감을 얻은 게 틀림없어 보인다.
알을 깬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반고는 도끼로, 싱클레어는 치열한 투쟁으로 알을 깼지만, 유가 사상에서는 ‘성의정심誠意正心’이라는 '간절함/치열함'으로 알을 깬다. 간절한 정성으로 ‘나’를 성장시켜야만 알을 깰 수 있는 것이다.
'정심正心'이란 무슨 뜻일까?
'마음을 바로 세운다'는 무슨 말일까?
소오생은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말로 해석하고 싶다. 처음 학문의 여행길에 올랐을 때의 그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마음을 바로 세우는 것' 아닐까?
일본인들은 서양학을 들여오면서 특히 인문학 관련 용어들을 정말 엉망진창으로 번역했다. 동양 · 인문학 · 동양학· 학문 · 문학 · 철학 · 종교 등등...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단어들 속에는 일제의 교묘한 언어의 함정이 숨어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가 이렇게 분열과 갈등에 사로잡히게 된 근본 원인이기도 하며, 울분에 찬 소오생이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딱 하나! '졸업 卒業'이라는 말만큼은 아주 잘 번역했노라 칭찬해주고 싶다. 중국에서는 '졸업'을 '삐(↘)예(↘), 畢業'라고 한다. '학업을 마치다 finish'라는 의미다. '성의정심'의 의미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졸업 卒業'은 '졸병의 업에 종사한다'는 뜻이다. 가장 큰 존재가 되어 알을 깨고 나갔지만, 새로운 세계에서는 가장 작은 존재가 되었으니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성의정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단어라 하겠다. 물론 그들이 이런 개념을 인지하고 번역했는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학생이란 존재는 '구도자'이다. 끊임없이 '나'를 성장시켜 새로운 알, 더 큰 알을 하나씩 깨면서 계속해서 더 큰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구도求道, ‘나’를 찾아가는 길이며 학문의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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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아져야만 성장할 수 있다. 성장해야만 알을 깨고 다시 작아질 수 있다.
한 인간이 탄생하여 알을 깨고 성장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천지창조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요 우주이기 때문이다.
오언 고시 한 수를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보자.
당나라 왕지환王之煥의 <관작루에 올라 登鸛雀樓>.
너무나도 유명한 구도求道의 시다.
하얀 해는 서산에 뉘엿뉘엿,
누런 강은 바다로 들어가 흐른다.
천리 밖에 시선을 다하고자
다시 한 층 누각 위로 올라간다.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전당강錢塘江 하구에 있는 항주의 육화탑六和塔. 저곳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37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저곳을 방문하여 조금 더 멀리 천리 밖까지 바라보고 싶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맨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다.
누각은 전망이 좋은 곳에 세운다. 누각에 도착하면 더 높은 곳에 오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전망이 좋다. 그러나 시인은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더 전망이 좋은 곳,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는 미처 보이지 않던 진리와 학문의 세계가 그곳에서는 보일지 모르므로. 이것이 바로 길을 걷고자 하는 모든 나그네이자 구도자求道者인 '학생'이 지녀야 할 '간절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