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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Dec 06. 2023

배추같은 딸에게 전하는 전심

게으른 사람의 김장 도전

 살면서 딱 한 번 김장을 한 적이 있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친구가 친정에서 절인 배추가 남았다며 집으로 가져다줬을 때다. 요리 열정이 지금의 두 배는 되었던 30대 후반, 남편과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며 김치 만들기에 성공했다. 그 외엔 어머니가 김장김치를 담가 보내주셨다. 지난해 어머니의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서 시댁 삼 남매는 각자 알아서 김치를 사 먹기로 했다.     


 올해는 휴직도 하고 있으니 김치를 조금만 담아볼까 객기를 부렸다. 남편 쉬는 날에 맞춰 해남 절인 배추를 주문했다. 며칠 후 김장 담그는 법을 유튜브로 잠깐 보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취중 객기에 실수한 사람처럼 서둘러 사이트를 찾아 주문 취소 버튼을 눌렀다.

-이미 배송이 완료되어 취소하실 수 없습니다.

문자가 왔다. 이제 어쩔 수 없이 김치를 담가야한다.

     

 간밤에 절인 배추가 도착했다. 일단 김치 냉장고에 배추를 넣어놓았다. 다음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김장을 담가야 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 아니던가. 밤사이 딸아이가 인후통에 시달리더니 아침에는 열까지 났다. 독감 검사를 받고 학교를 하루 쉬기로 했다. 그래도 다음 주가 시험기간이라 집에서 마냥 쉴 수는 없단다.


  딸아이는 중학교 1학년때부터 5년 동안 다닌 학원을 최근에 그만뒀다. 정확히 말하면 불성실이 쌓여서 퇴원처리 되었다. 딸아이가 다닌 학원은 강의식 수업이 아니라 자기주도학습으로 혼자 공부하는 곳이었다. 소신 강하기로 소문난 원장님이 5년 동안 몇 번의 슬럼프를 겪는 딸에게 여러 번 기회를 주셨는데 이번에는 마음을 굳히신 것 같았다.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퇴원 문자를 받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그간의 감사함을 생각하며 원장님께 감사의 문자를 드렸다.     


 그 후로 딸아이는 관리형 독서실, 그냥 독서실을 옮겨 다니며 혼자 공부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처럼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다른 학원에 가는 것도 싫다고 했다.

-엄마, 나 그냥 집에서 할래요

독서실에 있던 딸에게 문자가 왔다.

-그래 얼른 집에 와     

딸아이가 집으로 돌아온 날, 거실 창가에 큰 책상 하나가 놓이고 거실은 비교적 넓은 1인 독서실이 되었다. 때론 엄마와 수다를 떠는 카페도 되었다가 스텝퍼, 실내바이크에서 운동을 하는 헬스장이 되기도 하는 만능 독서실! 나는 딸아이의 등을 마주 보며 식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딸아이가 편안해보이고 딸과 같이 있으니 그냥 좋다.     


  절인 배추는 우리 집에 도착했는데 딸아이는 학교를 못 갔고 우리 집 거실의 정체성은 독서실과 주방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딸아이에게 김치를 담글건데 괜찮은지 물어보니 난색을 표했다. 재료 손질도 해야 하고 믹서기로 재료도 갈아야하니 소란스러울게 분명하다. 김장은 다음 날로 미루기로 했다. 그렇게 배추는 하루 밤을 더 김치냉장고에서 보내야 했다. 절인 배추를 가만히 보니 꼭 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와 딸에게     


 풋내 나는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 김치가 될 준비를 하듯 너도 풋기가득한 성정을 유연하게 만드는 시간을 가지고 있구나. 소금이 배추를 김치답게 만들듯 지금의 소금같이 짠 시간들이 너를 너답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되길 바라. 너에게 뿌려진 소금이 거칠고 짜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금이 거칠고 짜야 배추가 잘 절여지는 법이니까.

    

 그 덕분에 너에게 잘 스며든 양념은 너를 부드럽고 풍미 는 김치로 만들어주고

다른 재료들과 더 잘 어우러지게 해 주고

다른 음식과 조화를 이루어 더 근사한 음식을 만들어낼 테니.     

 

네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설지 모르지만,

막 양념을 무치고 수육과 함께 주인공으로 대접받을 때도

쉬어져서 한동안 식탁에 올라가지 않을 때에도

너의 존재는 항상 중요하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내일이면 저 배추에 양념을 치대야한다. 게으른 사람이 용감하게 절인 배추를 주문했다. 가장 간단하고 쉽게 맛있게 만드는 방법을 궁리해야겠다.

 아! 내일은 남편이 없다.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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