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컫는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경에 기반을 둔 기존 세력이 아닌 서경의 신흥 세력이 부각되었다. 이들 서경 세력은 고려 4대 국왕 광종 이후 주도권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에게 빼앗긴 세력이었다. 특히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은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과감히 탄핵해 그를 귀양 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정지상은 인종(仁宗)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고,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설득하여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이지저(李之底) 등 사대적(事大的)인 개경의 귀족이 반대하여 중지되었다.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묘청은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자연재해가 잇따라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사태가 반전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정월 어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 이하 관리들과 상경인(上京人)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이후 개경의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산역―관산역―사암역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토적(討賊)의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어 서경 주위의 여러 성(城)을 산하에 끌어들여서 이들을 달래었다.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連州)를 거쳐 안북대도호부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진압군)에 호응·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진압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전황이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이 묘청과 유참,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윤첨(尹瞻)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윤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한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 후 약 1년 동안 계속되다가, 반란군의 수장인 조광 등이 스스로 몸을 불태워 목숨을 끊자, 성 안의 사람들이 정부군에 항복함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한다 만일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으리라고 한탄한다(묘청 개인에 대하여는 광망하다는 표현을 쓰며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개경세력과 이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에 권력투쟁일 뿐이며, 금국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뿐이라는 것이다.
이 서경천도운동은 그들의 공리심과 서경인의 기질 등이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나, 그밖에 그들의 정치적 혁신의 의욕도 간과할 수 없다. 당시 국내외의 정세에 비추어 개경의 타성적이며 부패한 귀족 사회의 생태를 좌시할 수 없어, 당시 인심을 지배하고 있던 음양도참설을 교묘히 이용하여 서경인 중심의 중흥정치를 베풀어 보고자 한 것이 그들의 당초의 이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여튼 이 묘청의 난으로 인하여 권력구조에서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결국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무신의 난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인재 기용의 실패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2. 1951년 1월 4일. 서울, 중공군과 북괴군에게 탈취당하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하지만 10월 24일, 중공의 마오쩌둥은 조선은 중국의 문턱으로, 일본이 조선 강점 이후 조선을 중국 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했음을 들어 미국의 조선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연설하며, 10월 25~26일, 중국 인민지원군을 한반도에 파견한다. 맥아더의 판단 패착이 낳은 실수였다.
청천강 유역에서 인민의용군은 UN군의 측면을 괴멸시켰고 UN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전방 인민의용군은 중화기나 승무원 탑승의 경기갑이 전혀 없었으나 그들은 작은 규모의 부대를 침투시켜 여러 분대로 나눈 후, 한 분대가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사이 남은 분대는 전방과 측면을 합동 공격하는 방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지휘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냈다. 이에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성명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은 요란한 나팔과 징을 동원하여 적군을 혼란시켰고,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한국 전쟁에 중국 공산당이 투입한 군사는 92만6천명이나 되어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