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 전나무 숲길에서 나를 만나다

십 년 만의 외출

그녀가 진입해야 할 IC는 이미 십분 전에 지났다. 실수로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날의 도착지가 적어도 강의실은 아니고 싶었다. 끊임없이 강의실로 가야 한다는 마음과 오늘만큼은 온전히 나답게 보내고 싶다는 두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지만 결국 진입해야 할 IC가 나타나자 그녀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그녀에게 홀로 여행이 사치품목이 되어버린지 십여 년이 되었다. 끊임없이 홀로 떠돔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내려놓게 된 계기는 결혼, 그리고 바로 찾아온 두 아이의 출산과 양육이었다.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혼자만의 시간에 집착하던 때와 달리 그녀의 창조물 같은 두 아이를 바라보고 행복해하고 때로는 육중하게 다가오는 책임감까지, 낯설긴 했지만 또 다른 그녀를 발견해 나가는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한 번씩 휩쓸고 지나가는 ‘공허한 자아’라는 단어가 그녀의 깊은 내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씩이라도 나만의 표정으로 지내보고 싶어.’ 어렵지 않은 바람이었지만 그때의 그녀에겐 참 허락되기 힘든 소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시작한 공부를 하기 위해 공적인 외출(?)이 허가된 날 억누르기만 했던 그녀의 소망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오늘만큼은 스무 살 청춘의 3 무(무작정, 무대뽀, 무계획)를 다시 한번 누리고 싶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풍경 한 점, 스무 살 무렵의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 찾았던 그 숲길이 떠올랐다. 뜨겁지만 불안하기만 한 젊음을 견디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맞이했던 새벽의 시간. 혼자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가 걸었던 내소사 전나무 숲길. 그 숲길에는 이상하리만큼 특별한 정적이 있었다. 새벽의 공기, 안개의 냄새, 젖은 흙길의 촉감 그 모든 것이 몸에 스며들 듯 그녀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 새벽, 그 안개, 그때의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전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공기는 똑같이 차고 맑았다. 새벽의 안개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푸르고 싱그러운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자 시간여행이라도 하는 듯 그때의 모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른 어떤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롭고 행복했다. 때론 무겁게 불려지던 이름들이 아닌 그저 ‘나’로 존재했다. 눈이 시리도록 마음껏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천 년의 나이를 가진 나무 앞에서는 그저 작아졌다. 마음속의 소란들이 그 앞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겸손해졌다. 오랜 세월에 의해 빛이 바래가는 단청은 고즈넉한 세월의 멋이 더해져 오히려 수수한 찬란함으로 빛나 보였다. 모든 서정적 감상의 세포들이 살아 나는 놀라운 광경을 그녀는 목격했다. 현실을 도망친 게 아니라 현실 바깥에서 잠시 숨을 쉬었을 뿐이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그녀의 이름을 이 숲이 다시 불러주는 것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많은 생각들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어떤 녀석들은 그냥 공허하게 날아다니다 사라지기도 했고 또 어떤 녀석들은 집요하게 그녀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것도 마음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았다. 그녀의 지금이 그런 것처럼 모든 것에 자유를 허락해 주었다.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이 싫지 않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안다. 언제든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그녀가 너무 작아지고 작아져서 사라질 것만 같을 때 다시 이 숲길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이 길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 자유의 결을 따라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다만, 그녀가 그것을 원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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