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 속에 있는 동물과 직접 대화하고 있는 것일 지도
고통 속에 있는 동물과는 직접 대화하고 있는 것일 지도
윤리학 시간에 동물윤리를 강의하는 중이었다. 나는 오늘 수업시간 잠깐이라도 우리 인간이 동물들을 아무런 동의 없이 죽이거나 먹거나 실험하거나 구경거리로 만드는 일들이 과연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학생들의 눈빛을 보니 아마도 여러 이유로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물을 죽이고 먹는 일을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어린 시절 부모님과 손잡고 갔던 동물원에 대해 그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말을 끌어내기 위해 다시 질문했다. ‘동물을 죽이거나 먹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어느 정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소용 없었다. 오히려 ‘정도’를 생각해 보자는 이 질문이 더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다.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다. 요즘 TV를 틀면 연예인이든 유명한 셰프든 하나같이 그저 고기의 등급이나 마블링, 식감, 풍미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니 내가 말한 그 ‘정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고기가 입맛을 다시는 음식이기 전에 한 마리의 살아있는 동물이었다는 단순한 사실이 지금 우리에게는 왜 이렇게까지 낯설게 된 것일까. 고기보다 나물을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욱 거리낄 게 없으니 자신감이 붙었다. 나는 이참에 학생들이 경각심을 가졌으면 했다.
교과서에도 있는 파블로프의 개 실험이 실제로는 얼마나 오랫동안 잔인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식용동물의 사육과 도살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이 어떤 정신적 이상증상들을 보이고 있는지 그리고 산 채로 뜨거운 물에 넣기도 하는 문어가 얼마나 지능이 높은 동물인지 설명했다. 내 예상대로 학생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마지막으로 동물윤리를 둘러싼 여러 이론들을 설명하고 마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맨 앞에서 내 얘기를 따라오던 한 학생이 오른손을 반쯤 들었다.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서 질문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 학생의 질문은 정확히 1분 동안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왜 동물을 함부로 죽이거나 사육하거나 구경거리로 만들면 안되는 거죠? 그래도 된다는 게 아니라, 왜 그래서는 안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던진 한 학생의 질문에 지금까지 30분 넘게 자신감에 차 학생들을 쏘아붙이듯 강의하던 교수가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불쌍하긴 하지만 솔직히 우리는 동물의 고통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우리가 동물을 얼마나 비윤리적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교수가 난처한 질문을 피해가는 방법은 언제나 똑같다. ‘좋은 질문이네요. 우리 같이 생각해 봅시다. 혹시 아이디어 있는 분?’ 내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던진 이 호소는 효과가 있었다. 학생들은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물도 생명체이니 존중받아야 한다는 말도 있었는데 나는 속으로 무시했다. 아까 그 학생은 왜 존중해야 하냐고 물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치사한 방식으로 시간을 번 나도 이제는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준비가 덜 됐지만 결국은 그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는 사실 찾기 어렵습니다. 인정합니다. 무슨 이유를 대든 우리 사람의 기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결국은 남는 건 한 가지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고통 속에 있는 동물을 바라보며 느끼는 우리의 이 순수한 불편한 마음입니다. 누군가는 동정심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우리 인간이 동물과 대화하고 있는 특별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답답함은 우리 안에 있는 동물적 언어입니다. 동물의 그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몸부림치는 동물을 보며 느끼는 우리의 동정심은 단순한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을 느끼는 저 동물과 직접 대화하고 있는 방식일 지도 모릅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적어도 고통 속에 있는 동물과는 직접 대화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도 동물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동정심도 언어가 될 수 있는지는 저도 조금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하게 찾은 이 대답으로 나는 며칠 동안 다시 신나게 학자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