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가 유치원을 마쳐갈 때쯤 우리 가족은 산으로 둘러싸인 황금동으로 이사왔다. 우리 부부 둘 다 시골 출신이기에 아파트를 둘러싼 동산이 참으로 좋았다. 너무 높지도 않은 나지막한 뒷동산은 매일 산책코스로는 최적이었다.
아카시아꽃이 한창인 무렵, 같은 시간에 늘 다니던 코스로 산책하였는데, 왜 그리 숨이 찬지 남편과 자꾸만 거리가 벌어졌다. 누가 그랬다. 모든 집에 막둥이들은 허약하다고. 나는 일곱 번의 출산에서 마지막 순번이었으니 엄마의 끄트머리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았지만, 한계가 있었던지 늘 피곤하다는 소릴 달고 살았다. 그날도 그러려니 하며 산책하다가 번뜩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매년 나뭇잎이 무성하기 전인 이맘때쯤 내가 더 피곤했었구나….
나는 돌 전에 목에 염증이 심해 늘 목에 붕대를 감고 지냈다. 그때만 해도 의술이 발달하지 않던 때라 세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염증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옆집에 오셨던 손님이 담 너머로 나를 보고는 “저 아이 왜 저러냐?” 물었다. 옆집 아저씨는 나의 증세를 손님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손님은 뱀 알을 오줌에 보름 정도 절였다가 바짝 말려서 가루를 내어 대롱으로 목에다 불어넣으면 낫는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 민간요법은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염증이 줄어들면서 건강해졌다.
나는 심리를 공부하면서, 혹시 그때 늘 아팠던 어린 시절의 나 때문에 한 번씩 몸이 힘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큰언니한테 물어보았다. 큰언니는 나와 15살 차이난다. 늘 농사일로 엄마는 바쁘셨기에 우리 둘을 할머니와 큰언니가 돌봤다.
“언니야! 내 어릴 적 아팠다 했잖아? 혹시 그때가 지금쯤 아니가?”
“글쎄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가만 보자 음…,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이 맞네. 뱀 알 구한다고 들로 산으로 우리 친구들이 막 다녔는데 5월이었기에 마침 뱀 산란기라 바로 구했거든.”
아하! 내 몸이 기억하고 있었구나. 돌 전에 있었던 일이라 의식은 기억 못 하지만, 수면 아래의 거대한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봄만 되면 내 안에 숨어있던 그 돌도 지나지 않은 나약했던 아이가 “나 그때 너무 힘들었단다” 하며 말을 걸어왔구나!
수평선과 지평선 저 너머에는 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 무의식은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빙산의 수면 아래 가려져 있는 부분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아래에는 분명 거대한 세상이 존재한다. 이 거대한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뿐만 아니라 몸,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알게 모르게 지배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능력이 있다는 건 내 경험으로도 알 수 있다. 큰아이를 가져 입덧할 때의 일이다. 나는 평소에 못 느끼던 미원의 맛을 용하게도 잘 알아냈다. 음식에 미원이 극소량만 들어있어도 몸에서 받아주질 못했다. 진짜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때 ‘식당에서는 미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를 알게 됐다. 나는 그 어떤 식당의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입덧이 끝나고서는 원래대로의 미각으로 돌아왔다. 그 특출나던 나의 미각은 어디로 가고 둔하디둔한 미각으로 돌아온 것이다.
언니는 후각이 그랬다. 화장실 냄새를 맡질 못했다. 화장실 냄새가 나지 않는데도, 언니는 냄새난다며 형부에게 문이 열려있으니 닫으라 했다. 그 때마다 용하게도 살짝 열려있었다. 형부는 “야! 진짜 대단하다. 어떻게 알지?”하며 신기해했다. 그렇게 언니는 입덧을 마쳤다. 그러고는 원래대로의 후각으로 돌아왔다. 무디고 무딘 후각으로.
그렇다. 우리들의 그 특출한 감각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에 숨어 있던 것을 신이 잠깐 동안만 빌려준 것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만.
아인슈타인의 지능은 일반인들보다 엄청 높다. 그렇다면 무의식도 분명 유난히 뛰어난 사람이 있지 않을까? 무속신앙을 이러한 논리로 바라본다면 설명이 된다. 이렇듯 현대과학에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무의식으로 보면, 설명이 가능하다. 무속뿐만 아니라 사후 세계를 보았다는 사람도,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들도, 멀리 떨어진 사랑하는 이들과의 텔레파시도.
무의식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꿈이다. 제레미 테일러의 『사람이 날아다니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꿈』에서는 꿈을 신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라 했다. 그녀는 ‘신이 우리에게 매일 러브레터를 보내는데 우리는 뜯어보지도 않고 버린다’며 무의식의 소중함을 모른다고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나의 경험에 의하면, 뜯어보지는 않지만 버리지 않고 그 많은 편지를 차곡차곡 거대한 무의식의 창고에 저장해두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필요할 때 그것을 꺼내 보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