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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영욱 Sep 20. 2023

몽유(夢遊)이거나 순례(巡禮)

(2018년 직지신인문학상 당선작)


옆방에서 건너온 남자가 서성거린다, 

입에는 치약을 묻힌 채 

한 손엔 칫솔을 든 채 


자기 방이 어디냐고 묻는 질문에 

거울을 닦던 고무장갑을 벗어두고 

옆방으로 도로 데려다준다 


고작 벽 하나를 건너 온 여덟 걸음쯤에서 

자신의 이름표가 매달린 침대 앞에서 

자기 방으로 데려다 달라며 

발을 동동거리는 남자


그래, 삶의 온갖 난간을 넘어왔을 순례자에게 

지금 이 방은 허방일 터, 


내게도 낮잠에서 깨어나면 

낯선 방에 홀로 남겨진 오후가 있고 

어스름이 침착하게 내려앉던 네 시는 

버려진 지난 세기의 우주정거장처럼 쓸쓸했으니 


참 멀리까지 왔구나 싶다가도 

내게 허락된 방문이고 

내 머물 곳인가 싶다가도 

잠시 머물 뿐인 하루 


서글픈 날에는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거울을 닦는다, 

지금 내가 있는 방은 어느 방일까 


닦아도 닦아도 

제 소가지도 몰라보는 

요양원 삼층 화장실에서

고된 몸을 슬며시 떠나갔다 

돌아오는 넋을 마중하는

거울의 문턱에서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서성인다,

실습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느 문을 통과한 그가 

남은 순례의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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