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잡러강사 Feb 06. 20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기념일에 헌정하는 글

남의 집 뒷켠 셋방살이로 시작한 그녀의 어렴풋한 4살 때의 기억.

문을 열면 시멘트로 만든 아궁이와 부엌이 보이고

그녀의 키 만한 계단을 올라 쪽문을 열면

주인집 현관뷰가 보이는 단칸방에 세 식구가 살았다.

그녀의 아빠는 식품회사 영업직으로 대표에게 꽤 신임을 얻었지만,

매일 늦고 매일 취해 집에서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몇 번의 이사 끝에 아빠는 곧 대리점주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그녀 가족은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거기서부터 집안 형편은 풀리게 되었고,

그녀는 남들 하는 만큼은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자수성가한 아빠의 나르시시즘은 그녀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의 기억도 안나는 어린 시절.

일하던 그의 부모님이 아기인 그를 작업테이블 위에 잠시 올려 두었다가

순간 떨어졌는데 놀라서 장이 꼬여 큰 병원에 실려가고,

잠깐 한 눈 판 사이, 혼자 온 동네를 기어 다니다가 슈퍼 아줌마에게 발견되고,  

부모님의 맞벌이로 크면서 외가댁에 종종 맡겨지게 되었고,

끓는 물이 담긴 가마솥을 놓친 외할아버지가 친손주를 보호하려다 그만,

외손주인 그의 발에 뜨거운 물이 부어지게 되었는데,

살갗이 뜯기는 고통에도 이유없이 혼날까 봐 입도 뻥긋 못했던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집안도 그가 성장하면서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존중 못 받고 여행 한번 제대로 못한 그의 기억 없는 어린 시절은 그대로 묻히고 말았다.

 

그는 뜨거운 물과 아이들 보호, 안전에 극도로 예민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녀는 아빠랑 마주하는 게 알레르기가 돋는 것 같고, 결혼을 한다면

무조건 아빠와 정 반대인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심하컸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다.

마지막 여행지인 스위스 루체른에서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카니발축제가 열렸다.

그녀는 이것이 행복한 신혼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며 그에게 길거리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이라면 신뢰하고 자상하게 따라주던 그가, 갑작스레 기분이 다운되면서 호텔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그녀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이제 결혼했으니 다 잡은 물고기라고 생각해 마음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빠와 정 반대라고 생각한 이 남자.. 충격 그 잡채였다. 그와의 미래를 떠올려보니 여기서 그만 끝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놔두고 그녀는 혼자 축제 중인 거리로 나섰다. 곳곳에 가면과 분장을 한 사람들이 음악과 함께 큰 소리를 지르며 축제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기분도 별로였지만, 왠지 혼자 섞이지 못하는 느낌과 함께 살짝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 등 뒤로 그가 나타났다. 그는 주변을 연신 살피며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때 아닌 반가움에 그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고 같이 마트로 향했다. 치즈와 와인을 사서 호텔로 돌아와 둘이 와인을 마시며 결혼십계명을 작성했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 꼭 지켜줬으면 하는 것들을 각자 쓰고 조율해 나갔다.


그 후로, 둘은 다시 또 결혼기념일을 맞이했다.

둘은 이제 십계명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되었다. 눈빛만 봐도 서로 어떤 상태인 지 알아차린다.

그는 전날 잠 못 자며 근무를 하고 와서도 그녀의 일터에 직접 태워주기도 하고, 그녀의 일이 끝날 때까지 잠들지 않고 그녀의 잠자리를 따뜻하게 데워주며 기다린다.     

그녀 또한 그의 건강과 의식주를 살뜰히 챙기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다.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스밸브와 전기도 나가기 전 꼭 체크한다. 주방에서 요리를 할 때는 아이들을 그 근처에도 얼씬 못하게 했다.

그녀는 십계명을 적었던 그날 덕분에 서로를 이해하고 보완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그와 그녀의 이야기에서 인디언들의 결혼 축시가 떠올랐다.


"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의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을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각자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타협하며 함께해 온 그와 그녀에게 글을 헌정한다.


"사랑해서 함께한 게 아니야. 더 사랑하려고 함께 하는 거야."

                                                            - 영화 up 중에서 -


   


 


  

이전 11화 무엇이 되어야 하는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