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회인인 듯 사회인이 아닌 사회인 같은 사람들이었다. 전공이 무역이었고 무역협회에서 마스터 과정을 함께 하며 긴 시간 스터디를 했다.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놀았다. 그리고 함께 해외도 다녀왔다. 한마디로 함께 했던 것이 참 많았던 사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막내 같지 않은 막내였다.
우리는 각자 다른 무역회사에 취업해서 사회초년생 시절을 보냈고, 고되고 매웠던 사회초년생 시절을 함께 술과 수다로 떨쳐냈다. 그러다 우리 중 젤 맏언니가 암으로 먼저 하늘나라에 갔다. 우리 모두 충격이었다. 아직 우리 나이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시련이었다. 먼저 세상 떠난 언니는 밝고 총명했었다. 그래서 먼저 데려가셨나 할 정도로 사랑스럽고 능력도 충분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일로 한층 애틋해졌다. 언니가 가기 직전, 우리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놓고 갔나 보다. 우리는 이따금씩 추모공원에 가서 언니를 추모하곤 했다.
그렇게 애틋했던 우리가 하나둘 결혼하고 아이들까지 생겼다. 아이들이 생긴 후론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돈을 모아 계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한 달 2만 원.. 아직 아이들이 기저귀 차고 분유 먹는 시절 나는 한 달에 2만 원이 힘들었다. 외벌이인 남편의 눈치가 보이고, 출산으로 인해 몸매가 틀어지고 자존감이 바닥으로 추락하며 우울했다. 이제야 말이지만, 나는 산후 우울증이 맞았던 것 같다. 아이를 안고 모유를 먹이며 아파트 베란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급 뛰어내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큰 아이는 모유를 조금씩 자주 먹어서 그런 생각이 더 자주 들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렇게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언니들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아니, 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카톡으로 뜬금없이 나 힘들다고 할 상황도 못 되었고, 다들 바쁜데 내 얘기 들어달라고 전화통을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낸 곗돈을 정리하는 날이 왔다. 돈은 모였지만, 만날 수 없는 상황. 돈만 자꾸 불어나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 계모임은 깨졌다. 불화가 있어서도, 누구 하나가 파투 낸 것도 아니었다. 다들 그냥 비슷한 마음이었나 보다.
그렇게 코로나가 오고, 우리는 약 3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제는 봐야지 않나 하는 마음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우리 중 큰 언니인 A언니의 회사로 찾아갔다. A언니는 그동안 회사 내에서 높은 간부로 승진하여 큰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부럽기만 했었을 거다. 지금은 성장한 언니의 뒷모습도 보인다. 아직 나는 언니처럼 눈부신 성장은 이루지 못했지만, 마음의 성장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다. 언니의 직원들은 우리를 환대해줬다. 직원들이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고 우리는 회사와 가까운 언니네 집 근처 고깃집으로 갔다. 제주 흑돼지 식당이었는데 제주도에서 먹는 거보다 맛있었다. 음식이 맛있어서 그런 건지 소주가 한잔 들어가서 그런 건지 금방 분위기가 화기애애 해졌다. 남편한테 아이들 맡기고 오는 사람들까지 모두 왔다. 분위기가 좋았던 건 딱 거기까지였다.
2차를 가니 취기가 올라오고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일행 중 두 사람이 먼저 말다툼을 하며 나갔고, A언니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A언니에게 우리가, 정확히는 내가 그 정도밖에 안됐었나 하는 생각에 못내 서운했다. 몇 년만의 만남이 그렇게 끝이 났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들의 소중함을 느낀 건 그 이후다.
바로 내가 사람 때문에 힘들 때... 바로 그때였다. 나는 지금껏 우리 가족들 말고는 모두가 사회적 관계로 만난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일은 사람만이 치유가 가능하다고, A언니에게 곧장 전화를 했다. 나 지금 위로가 필요하다고. 언니는 선뜻 받아들이며 약속을 정해줬다. B언니도 내 위로에 보태겠다며 선뜻 와줬다.
나를 위한 위로의 자리. 마음이 가벼울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처음엔 내 위로로 시작했다가 점점 그날 이야기로 번져갔다. 낮술도 한잔 했겠다, 우린 진솔한 대화를 이어갔다. A언니도 우리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모임을 먼저 깨자고 한 것이 서운했단다. 원래 입이 무거운 A언니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은 우리 이제 더 친하게 지내보자였다. 자주는 만나지 못했어도, 그 옛날 십수 년 전 함께 공유했던 일들이 많았고 그만큼 정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무엇보다 먼저 하늘로 간 왕언니가 있었다. 당시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앳되고 어렸을 그 왕언니.. 우리는 그렇게 추억을 되새기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내가 왜 힘든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 만남 자체만으로 나는 치유가 되었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속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의 특징
첫째, 나보다 더 아픈 속 이야기가 있다. 나보다 더 아파 본 사람에게는 내 속을 알아보고 토닥여 줄 수 있는 심장이 있다. 여기서, 나를 알아봤으나 나보다 더 자존감이 낮아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결코 좋은 사인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아팠던 사람에게는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교훈 삼아 토닥거릴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이 있다.
둘째, 항상 밝고 긍정적이다. 밝고 긍정적인 사람은 포용력이 있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존중할 줄 안다. 수용적인 사람들이 많아 그 속은 알 수가 없고, 더 큰 아픔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적어도 우리의 속사정을 알고 피해를 줄 사람들은 아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피해를 줬다는 사실을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울 사람들이다.
셋째, 그들에게는 지혜로운 대처법이 있다. 모를 땐 물어볼 줄도 알아야 한다. 물론, 아직은 신뢰하지 못한 사람에게 할까 말까 했던 이야기를 하는 건 찝찝하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훌륭한 요령을 알게 되기도 한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피드백을 줄 수 있다는 건 그들은 이미 살면서 한 번쯤 겪었을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므로.
꼭 나이가 들고 경륜이 많아야지만 지혜롭고 현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충분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수용력이 있는 사람이 있다. 나를 안아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