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날씨가 무슨 상관이랴!
러닝에 있어 왕도는 없다.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나아갈 뿐. 비도 눈도 어떤 것도 러너들의 열정을 막지 못한다.
우중(雨中)런, 설중(雪中)런 등 악조건에도 러너들은 나름의 이름을 붙여가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저하지 않는다. 보슬비가 장대비로,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이어지면서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지고 아무도 없는 주로에서 고립된 기분이지만 그럼에도 뛴다. 머리가 축축하게 젖고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지지만 아무렴 상관없다.
설탕 입자처럼 가늘고 고운 진눈깨비로 시작해 점점 굵어지면서 머리에 쌓이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바닥에 닿을 때마다 마치 우산을 거꾸로 한 모양의 형태로 떨어진다. 빗소리와 함께 "챱챱챱" 발자국 소리가 더욱 묵직해진다.
비에 젖은 생쥐마냥 평소보다 몸이 몇 배로 무겁게 느껴진다. 다리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차고 누군가 위에서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다. 두더지 찾기 게임처럼 중간중간 물 웅덩이도 잘 봐가면서 피해야 한다. 시야가 좁아지기에 몇 배는 긴장을 하고 바닥을 확인하며 가야 한다. 아무도 없는 주로에서 '왜 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싶다가도 어느새 비를 맞으며 즐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비가 와도 모래놀이를 하며 동심에 빠진 거처럼 그 순간에 흠뻑 취한다. 그 순간만큼은 드라마 주인공이다. 내가 제일 멋있다고 자아도취하며 궂은 날씨에도 뛰고 있는 나를 위해 합리화한다.
외부 체온은 떨어지지만 습한 날씨 때문에 땀은 비 오듯 난다. 빗물인지 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흠뻑 젖으면 어느새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완주하고 나서는 급격한 온도차로 인해 감기에 걸리지 않게 수건으로 흠뻑 젖은 머리부터 털어내 주며 으슬으슬한 몸을 데워준다. 물비린내와 땀내가 섞여 너무 찝찝하기에 서둘러 집을 향한다.
필자는 물에 취약한 기계장치인 보청기를 착용하고 있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당연히 러닝을 쉬는 게 맞지만 그럼에도 1년간 고대하며 준비했던 대회나, 오래전부터 약속되어 있던 러닝모임인 경우, 어느 정도 젖을 각오를 하고 뛰기도 한다. 캡모자를 쓰고, 그 위에 방수재질인 바람막이 모자를 뒤집어써서 최대한 철통보안을 해준다. 정 안되면 최후의 보루수단으로 보청기를 빼고 대회에 나가는 방법도 있다. 정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오로지 앞을 향해 달릴 뿐이다. 러너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종종 뒤를 힐끗힐끗 확인해 주며 나 혼자와의 사투를 벌인다. 달리기에 있어 요행은 없다. 그저 앞에 보이는 주자의 등을 보며 묵묵히 달릴 뿐이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작년 손기정 마라톤과 JTBC 마라톤 10km 대회에서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