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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Jun 08. 2022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의 일부이자 전부

나는 내 상처를 내 일부이자 전부로 보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는 앞으로 제가 연재할 제 실제 이야기들입니다.

본 글은 오드아이로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기 위해 쓰여진 글들 중 일곱 번째 편에 해당합니다.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나를 알아주는 사람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글을 쓸래요, 난.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근데 그게 뭐라고?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안녕, 오드아이.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다른 눈으로 (brunch.co.kr)

오드아이로 내 인생에서 살아남기 : 같음과 다름의 사이 (brunch.co.kr)








내 나이 한국 기준으로 29세. 오드아이로 살아가면서 가장 피곤한 순간은 딱 2가지인 것 같다.

증명사진을 찍어야 할 때와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나의 오드아이를 소개해야 할 때. 두 경우는 '박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공적 사진으로서의 박제되는 나의 오드아이. 새로운 타인에게 박제되는 나의 첫 인상은 살면서 마주치지 못했던 오드아이라는 희귀성.


사실 증명사진의 경우, 단 한 번도 내 진짜 눈, 그러니까 오드아이를 오픈한 적이 없다. 검은색 렌즈를 미리 착용하고 가거나, 포토샵을 통해 눈 색을 숨겨왔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웨딩플래너는 내게 '신부님, 웨딩 촬영 시에 렌즈 끼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물론, 악의적인 의도가 아니고, '안 끼고 촬영하셨으면 좋겠지만 마음에 걸리시면 렌즈를 소지하고 오셔라'의 취지였다. 물론 아직 웨딩 촬영을 하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고, 그 남은 시간 동안 나는 고민을 이어갈 예정이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타인에게 소개할 때를 논해보자. 내 오드아이에 속하는 왼쪽 눈 색은 햇빛의 영향에 좌우되는 색이다. 빛과 색이 매우 강한 연관성이 있다는 걸 나는 과학적인 이론보다 내 경험으로 먼저 습득했다. 빛이 밝으면 내 눈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색감을 다 확인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오드아이라는 점이 쉽게 노출이 된다. 하지만 어두운 환경 속에서는 다른 눈이랑 큰 차이가 없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타인과 마주할 때, 빛의 영향에 따라 타인은 나를 오드아이로 인식할 수도, 또 그렇지 아니할 수도 있는 셈이다.


만약 내 눈이 오드아이란 걸 알았을 때, 지금까지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3가지 정도로 나뉘어진다. 첫째, 렌즈가 예쁘네요 혹은 렌즈 한 쪽만 끼셨나 봐요의 경우. 보통 렌즈를 한 쪽만 착용했고 그 렌즈 색이 독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자매품으로 '어머 렌즈 한 쪽이 빠졌어요'도 있다. 둘째, 오드아이세요?라고 바로 알아보는 경우. 오히려 나는 이 경우가 꽤 반갑고 신기하기도 했다. 오드아이라는 용어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밌었기 때문이다. 셋째, 무응답. 이 경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두운 환경이라는 조건 속에서 인지하지 못한 경우거나 인지했음에도 여러 이유들로 별도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측된다. 뭐가 되었든 내 마음에 들고 아니고의 경우는 없다. 내 눈은 그저 존재하는 거고, 이 반응들은 나의 것이 아닌 타인들의 것에 속하기에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양한 경우의 수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


그렇게 사진으로 박제되거나 첫인상으로 박제되거나, 어찌되었든 그만큼 오드아이는 내 일부이자 전부다. 앞선 시리즈를 통해 오드아이라는 특수성이 곧 나의 상처이자 정체성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듯, 오드아이는 내 신체의 일부인 동시에 나를 대표하는 단 한 가지 키워드로서 전부가 되기도 한다. 한때 나는 오드아이가 내 전부라고 인정하지 못했던 때도 있다. 그 주장도 물론 틀리지 않다. 그때 나는 '대체 난 왜 오드아이'라는 좌절감에 빠졌을 때였다. 그래서 오드아이는 그저 신체의 일부일뿐이고, 나는 오드아이라는 상처 그 이상의 존재임을 되내이곤 했을 때 주장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일부'임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오드아이가 내 상처임을 전제로 깔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 상처 안에서 매몰되지 않기 위해 '오드아이'가 일부라고 고백했던 것이 다시 한 번 오드아이가 내 상처임을 공고히 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나는 오직 내 마음 하나 편하고자 오드아이를 내 전부로 결론 내렸다. 내 전부를 오드아이로 생각하는 순간, 나는 오드아이를 오직 상처로만 규정 짓는 게 아닌, 상처와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로 완성된 지금의 나를 묶어서 호칭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드아이는 내 일부이자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바로 눈치를 챘겠지만. 그렇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유일무이한 상처 단 하나를 오드아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기쁜 일일까? 살다보면 다양한 상처와 시련들을 많이 마주함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내 일생일대의 상처는 오직 오드아이를 주창하고 있으니. 오드아이 단 하나로 인해서 지난 아픈 시간들을 만끽할 겨를도 없을 뿐더러, 상처 축에도 끼지 못한 것은 아닐지.


몸에 특수한 것 하나 갖고 살아가는 건 영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의 해리포터, 소설 <빨간머리 앤>의 앤, 그리고 뮤지컬 <위키드>의 엘파바까지 저마다의 몸에 새겨진 하나의 증표들. 그러나 결국 그 증표들로 주인공들은 기꺼이 새로운 세계를 온 몸 다해 맞이하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냈다. 어렸을 때(물론 지금도 내 브런치 프로필에 그렇게 썼다만) 나는 내 오드아이가 해바라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어서 고흐의 해바라기가 비싸고 굉장한 것처럼(!) 나도 내 존재가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다. 또 (종교는 없지만) 신이 있다면 나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기 위해 내 눈에 이런 증표를 찍은 게 아니라, 오히려 알아보기 위해서 더 잘 나아갈 수 있도록 그걸 알아보기 위해 내 눈에 특별한 표식을 해둔 거라 믿곤 했다. 그래서 더욱 더 오드아이는 내 일부이자 전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물론 지금 내 정체성이 오드아이로만 귀결되진 않는다. 회사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홍보기획팀 팀원, 가족에겐 든든한 맏딸, 애인에겐 사랑스럽고 장난꾸러기, 친구들에겐 갓생 사려고 노력하는 웃긴 친구 등.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 나는 오드아이 그 자체다. 다름으로 인해 상처 받고 아팠던 시간들만큼, 누군가의 다름(사람은 어차피 다 다를 수밖에 없다)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최종 목표이자 삶의 방향성이라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내 상처를 내 일부이자 전부로 보는 게 아니라, 어떠한 시작으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과정들이 담긴 이야기를 내 일부이자 전부로 보겠다는 말을, '오드아이는 내 일부이자 전부'라는 표현을 통해 공표하는 것이다.


오드아이에 대한 글이 이번으로 총 7번째에 해당한다. 살아가다 보면, 현생에 치이느라 내가 오드아이인 걸 꽤 자주 잊어버리고, 거울을 봐도 아무 감흥이 없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내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들, 오드아이에 대한 나만의 신념을 이렇게 글로 풀면, 나는 내가 더 좋아진다. 오드아이가 아닌 나도 나쁘진 않겠지만, 나는 내가 오드아이라서, 그 시간들을 나와 함께 견대내며 다양한 예술작품에 나를 투영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기꺼이 용기내었던 나날들을 이어왔다고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도 일부이자 전부인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걸로 인해 어떤 삶을 걸어왔나요, 진심을 담아 그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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