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사람이나 롤 모델 있으세요?”

by 오제이



"존경하는 사람이나 롤 모델 있으세요?"


얼마 전 점심시간에 나온 질문이다.

...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매달 하루씩 특별한 점심시간을 가진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점심시간을 시작해 총 두 시간 동안 점심을 먹고 올 수 있는 것.

평소 웨이팅이 길어서 못 갔던 곳이나, 살짝 먼 곳까지 떠날 수 있는 조금 특별한 날이다.


이날에는 지인을 불러 맛집에 가기도 하고

친한 직원들끼리 모여서 괜찮은 음식집을 찾아가기도 한다.

평소에는 도시락을 싸오던 사람들도 이날만큼은 외식에 참여하곤 하는데,

많아진 인원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음식점을 찾느라 애를 먹는 날도 있다.

그래도 다 같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

매달 이날이 오는 걸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이번 점심시간에는 포옹남이라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맛있는 요리를 맛봤다.

12시에 오면 웨이팅 리스트가 꽉 차 있을 정도로 붐비는 곳이지만

30분 일찍 오니 마침 빈 좌석이 있어서 기다리지 않고 식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름도 어려운 분티느엉이라는 요리를 주문했다.

채소도 많이 먹으면 배부르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양이 많았다.

우리 팀의 공식 먹보인 허신사 님도 양이 많다고 할 정도였다.

반찬도 맛이 좋고, 고수를 아낌없이 받아볼 수 있어서 무척 만족스럽게 점심을 먹었다.


포옹남 종로점은 올해 가을 새로 문을 연 베트남 음식 체인이다.

현지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한 인테리어 덕분에

이국적인 느낌을 즐기며 식사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


물병과 소스통의 청결함에서부터 오픈 키친이 주는 깔끔한 인상,

밝은 표정과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직원들 덕분에

기분 좋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맛이 조금 부족해도 친절하고 깨끗한 곳이면 마음속 즐겨찾기에 저장해 두는 편인데,

포옹남은 맛까지 훌륭한 덕에 벌써 나만의 최애 식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넓은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을지로의 숨은 공간인 브릿지 파노라마는

층고가 높고 널찍한 테이블이 많아 단체로 갈 때 자주 찾는 곳이다.


이곳은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와인바로 운영하는 공간이다.

나는 주로 낮 손님으로만 방문하고 있다.

한 쪽 벽을 가득 채운 와인병을 보면 밤손님이 더 많은 것 같다.

작년에 새로 생겼을 때만 해도 사람이 많지 않아 사징님이 직접 모객을 하셨는데

이제는 꽤 유명해졌는지 점심시간에 가도 사람이 어느 정도 들어 차 있다.


사실 이곳의 커피는 내 취향과 딱 맞지는 않았었다.

그저 공간이 좋아 발길을 끊지 않고 꾸준히 찾아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커피 맛이 입에 잘 맞는 느낌이다.

커피 맛이 달라진 건지, 내 입맛이 커피에 맞춰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 방문했을 때는 음료를 주문하면서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쿠폰을 꺼내 내밀었다.

도장을 10개 모으면 음료 한 잔을 무료로 주는 쿠폰이었다.

그걸 받아 본 직원은 마치 삼국시대 유물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이 쿠폰은 안 쓰는데... 우와...'


맞다. 이 쿠폰은 작년 오픈 초기에 도입했다가 얼마 안 돼 사라진 쿠폰이다.

지난여름이었던가? 할라피뇨 님의 생일을 맞아 아침 시간에 카페에 방문했을 때,

사장님이 직접 커피를 내려준 적이 있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켜고 예열을 하는 동안 우리는 스몰 톡을 나눴는데,

그때 나는 그동안 모은 쿠폰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내 쿠폰을 가져가더니 빨간 볼펜으로 남은 도장란을 직직 그으며

'다음에 올 때 우리 직원한테 이걸 주고 음료 한 잔 받아 가요'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쿠폰에 얽힌 사연을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이거 사장님이 이렇게 해주셨어요. 다음에 올 때 음료 받아 가라 하시더라고요.'

내가 제대로 이야기한 건지 잘 모르겠다.

다행히 직원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줬다.

오늘따라 맛이 좋은 걸 보니, 역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는 공짜 커피가 아닐까 싶다.



주문을 마치고 우리는 합판을 붙여 만든 넓은 목재 식탁에 둘러앉았다.

스타벅스의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도 멋지지만,

이곳의 인더스트리얼 느낌의 식탁도 멋스럽다.


인더스트리얼이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재밌는 단어다.

만능 단어라고 해야 할까?

공업용 자재를 대충 엮어 재활용한 곳에는 인더스트리얼이라는 말을 가져다 쓰면 얼추 어울린다.

심지어 천장 마감 공사를 제대로 안 해 놓은 공간에도

인더스트리얼 콘셉트라고 말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마법 같은 단어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따뜻한 커피에 입김을 불었다.

엠제이 님의 청원 경찰 사건부터 허신사 님의 이태원 클럽 좀비 목격담 등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점심시간이라서.

우리는 주로 가벼운 소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한 적 없거늘,

우리는 알아서 일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 높은 품격을 보여줬다.


그러다 문득 나는 최근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다들 존경하는 사람이나 롤 모델 있으세요?"


롤 모델을 정하고 그 사람의 말투나 행동을 본받으려 노력하면

결국 자신도 그 사람처럼 멋지게 변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 던진 물음이었다.


롤 모델이 없다는 대답 사이에서 아이세이 님이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존경까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가끔 엄마를 보며 감탄하곤 해요."


어머니의 차분함과 여유로움, 관대함을 보며

그 어른스러움에 경외감을 느꼈다는 아이세이 님의 이야기.

이 말을 하는 동안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를 보며

아이세이 님의 안에 깃든 잠재력이 무척 크겠다는 느낌이 와닿았다.


자신의 자녀가 자신을 존경하고 우러러 봐주는 삶은 어떤 느낌일까?

그보다 잘 산 인생, 행복한 인생이 또 있을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런 게 금수저가 아닐까 싶다.


사실 수저 색을 결정하는 것은 집안의 재력이 아니다.

부모의 윤리관과 품격이다.

좋은 부모와 가정을 만난다는 것은 그렇다.

그것은 대물림되며 이어진다.

나의 가정을 금빛으로 만드는 방법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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