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가난했고, 가난하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은 태어났을 때부터 당연했고 그 사실이 한 번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돈이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나는 돈이 많은 사람보다 부족하다고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1학년부터 4학년 때까지 아빠는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셨는데, 그때 우리 가족은 돈이 제일 없었던 시기였다. 물가가 제일 비싼 주 중 한 곳에 있었을뿐더러 유학생 신분으로는 근무가 제한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식구는 4명이나 되니 당장 내일 먹을 쌀이 없을 정도로 어려웠었다.
나는 내가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은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출국하는 때였다. 그때는 추운 겨울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서로만을 의지하여 미국으로 향했다. 4인 가구가 해외로 나가는 것이기에 아무리 짐이 없어도 추가 비용 없이 이민 아닌 이민을 간다는 것은 각자 감당해야 할 짐이 무지막지하다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아마 무게가 꽤 초과 됐을 텐데도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 짐이 다 통과가 되었으나 (아마 우리를 측은하게 여긴 듯하다), 그 말인즉슨 그 짐을 다 들어야 한다는 것.
당시 짐 무게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옷은 겹겹이 싸 입은 채, 나에게도 꽉 채운 서너 개의 가방이 주어졌다. 책가방과 크로스백은 메고, 양손에도 짐을 들었다. 이제야 말하지만, 당시 정말 힘들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이 확실히 날 만큼 힘들었다. 만 6살 나이의 나에게는 너무 무리가 되는 짐이었지만, 부모님은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더 많은 짐을 들고 계셨기에 도움을 청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때 혼자 다짐했다. ‘’절대 무거운 거 티 내지 말아야지. 이건 내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야지.‘ 그리고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심지어 가벼운 척, 신나는 척도 했다. 못할 것 같았는데, 해보니 되더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때 막연히 깨달았다. 이젠 내가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가는 것을.
미국에서는 가족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한동안 아무것도 없이 살았다. 종이 상자를 뒤집어 식탁으로 사용했다. 어렸을 때부터 상상력이 풍부했던 나는 일종의 놀이로 생각하기로 했다. 정말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눈치껏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무지 지쳐있었다는 것을. 엄마가 자기도 모르게 실망했다는 것을. 더 긍정적으로 지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어찌 보면 모순적인 태도였다.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누군가는 비관적이라고도 한다) 낙관적인 나의 삶에 대한 태도는 이런 식으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싶다.
만 6살에 알파벳도 다 못 외운 채 (그 와중에 자존심을 부려 나란 아이는 학교는 일찍 들어가겠다 우겼다.) 쉬는 텀도 없이 바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정말 영어를 하나도 몰랐다.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됐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학업과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아버지와 타지에서 막 6개월을 넘긴 동생을 돌봐야 하는 어머니는 나를 신경 쓰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사실 언제부터 영어를 익혔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참 다행이었다. 책도 무지 좋아했고 너무 어렸어서 인지 그만큼 습득력이 빨랐다. 그냥 어느 날 엄마가 내가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걸 보면서 놀랐던 날만이 기억이 난다. 그때는 엄마가 왜 놀라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만큼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혔다. 미국을 떠날 즈음엔 또래 중에서도 영어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이래서 독서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응이 쉬웠다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나는 나 자신을 소개할 때 적응력이 매우 뛰어난 것을 장점 중 하나로 꼽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한동안 나는 친구 관계에서 붕 떠 있었다. 학생 중 98%가 경제적으로 상위층에 속한 백인인 학교인 것도 한 몫했다. 나와는 다른 환경의 친구들이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너무나도 도드라졌다. 그러나 나는 오기가 생겼다. 기가 죽기는커녕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원래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더 외향적으로 지냈다. 먼저 다가가고, 기분이 상해도 빨리 털어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알아서 숙제를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했다. 부모님께 단 한 번도 숙제로 도움을 청한 적이 없다. 공부는 금세 곧잘 따라갔고, 사실 부모님에게 도움을 구하기에는 부모님이 너무 바빴을뿐더러 내가 혼자 하는 게 낫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움을 청해도 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데, 부모님이 서운해하시는 걸 알아도 어쩔 수가 없다. 심지어 나도 서운할 때가 있다. 다른 부모님은 시시콜콜 다 챙기는데, 하면서. 하지만 서운한 만큼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고, 익숙해졌고, 편해졌다. 나도 내가 처리하는 것이 더 편해졌고 부모님도 나를 도우려면 나를 능가할 만큼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여태까지 홀로 모든 일들을 처리해 왔던 만큼 능숙해졌고 철저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과정을 상의하기보다는 결과를 내고 나서,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드리는 것으로 스스로 합의를 봤다.
쌀이 똑 떨어졌지만 쌀을 살 돈이 없었던 우리 형편은 나를 독립적으로 키워냈다. 내 아이가 나의 인생을 겪길 바라지는 않지만, 나는 지금 이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괜찮다. 아쉬운 점은 있어도 그 누구도 원망스럽지 않다.
다음 주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