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은 마가 끼었었다.
원래는 리버티 스퀘어 쪽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방해가 들어왔다. 장소를 바꿀까 해서 루스타빌리 역 근처의 지하 보도 쪽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자리도 이미 다른 연주자가 차지한 상태. 검은 머리카락에 약간의 수염을 기른, 스무살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와 기타 연주자가 있었다.(나중에 이들과 알고 지내게 되는데, 이들의 이름은 파푸너와 일리야이다.) 어깨 뒤쪽에 피아노가 든 검은 가방이 보였을 텐데 개의치 않는 건지, 남자는 모자를 내밀면서 팁을 달라고 신호를 보냈고 나는 잔돈을 조금 넣었다. 과장될 정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는 그를 보면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면 잘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지나쳐 지하보도를 빠져 나와 지상으로 올라왔다. 다른 버스커가 근처에 있거나 말거나 연주를 하는 몰상식한 버스커들도 종종 있지만, 난 그런 타입이 아니다. 이미 차지당한 장소 말고 적당한 곳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근처의 벤치에 잠깐 앉았다.
‘조금 난이도가 높긴 하지만 오늘은 역 바로 앞에서의 연주를 해 볼까….’
지하철 역인 루스타빌리 앞은 유동인구가 많아서 버스킹을 해 보기에 나쁜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연주하는 사람을 이 나라에 온 뒤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암묵의 룰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룰이 있는지는 연주를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법이다. 결심을 다지면서 다소 멍한 표정으로 내 앞을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기타를 멘 금발의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뭐지…?’
의아해서 그가 이쪽을 바라볼 때까지 끈질기게 쳐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맞은 편의 상점가에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잘못 봤나 싶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생각난 김에 역 앞에서 해 볼 생각으로,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피아노 가방을 다시 등 뒤로 돌려 멘 다음 역 쪽으로 향했다. 이 벤치는 역과는 약 200미터 가량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 간 걷고 있는데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까 나를 쳐다보던 기타를 멘 남자였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나와 걷는 속도를 맞춰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가 내 곁을 맴도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몇 걸음만에 그 역시 걸음을 멈추더니, 별로 신기하지도 않은 왼 편의 상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둘러보는 척으로 느껴지는 어딘가 어색한 움직임이다.
대체 뭐지???
내 착각일 수도 있다. 어슬렁 거리면서 걷는 게 현지인이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관광객이라 주변 구경에 넋을 빼앗겨서 그랬을 뿐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나를 따라 조금 움직이나 싶더니, 내가 물을 먹는 척 하기 위해 멈춘 분수에 시간차를 두고 다가왔다. 내가 본인의 움직임을 읽었다는 것은 눈치 못 채고, 나에게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오려는 속셈인 게 느껴졌다.
‘빼박이군…. 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빨리 하라고.’
나는 속으로 짜증을 내면서 아무 눈치도 못 챈 척 기다렸다. 마침내 그가 말을 걸었다.
“안녕, 혹시 이 피아노 네 거니?”
“….”
내 것이 아닌 피아노를 가지고 다닐 리가 있냐? 이 멍청한 질문은 뭐지? 나는 대답하는 대신 대꾸했다.
“기타는 네 거니?”
“….”
몇 번의 의미없는 문답이 오간 다음, 그는 용건을 꺼냈다. 돌려 말하긴 했지만 말을 섞어 보니 그 역시 버스커로, 나도 버스커인지 혹시 협주를 할 수도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을 미루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재미 삼아 어울려서 버스킹 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드문 일은 아니다. 행사나 축제로 공연 온 경우에는 그렇지만도 않지만, 그냥 거리에서 연주할 경우에는 가끔 그런 일도 있다. 뭐, 홍대같은 곳에서는 자기 공연만 깔끔하게 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하지만…. 그러나 행적이 수상한 데다 아까는 나를 노리고 왔다갔다 했던 것이 분명한 이 아이를 믿어도 될까?
하지만 나는 몇 초 후 의심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관광객 대상으로 금품을 터는 일행의 일원이라면 아까처럼 어딘가 맥빠진 대화로 포문을 열 게 아니라, 상대의 구미를 당길 만한 소재를 꺼냈을 거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동양인이란, 범죄 타겟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남아에 가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이 많다는 이유로 타겟이 되는 모양이지만, 이 사람들은 나와 중국인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데다 전체적으로 동양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편리하게도 금품을 노린 범죄에서는 제외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눈앞의 청년은 내 태도에 조금 겁을 먹었는지 얌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바람이 살랑거리고 있었고 단발에 가깝게 기른 금발이 조금 흐트러졌다. 기타 실력이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버스커들이 어떻게 하고 사는 지도 궁금하다. 호기심이 경계심을 이겼다. 나는 앞장서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