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식과 새
(2020년 4월에 씀.)
4월의 말일이 되어가는데, 때 아닌 추위로 점퍼를 걸치고 출근했다. 코로나 시국의 의원은 전과 너무 다르다. 진료실은 적막하고, 직원들은 생기가 없어 보인다. 아, 경제적으로 나는 망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절박함을 느끼거나 반대로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상황은 그 상황대로 인생에 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애당초 간절히 원했던 이미지는 보람을 느끼면서 의업을 행하는 내 모습이었지, 와글와글한 진료실은 아니었으며, 우습게도 오늘 책 한 권 읽은 것이 나에게는 그런 이미지보다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오늘은 책을 음미할 여유가 있지만 혹여 내일은 한계에 도달해 빈곤의 문제가 닥치면, 그때는 늦지 않게 부유함의 소망을 품어보련다.
모든 인지적 생명체, 특히 인간은 두 종류의 세계 속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그 둘은 육체가 속한 세계와 정신이 속한 세계이다. 대부분 인간은 육체의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생존 이상의 부를 과시하고, 필요 이상의 권력을 남용하고, 감당 못할 명성을 갈구하면서, 이러한 거짓 행복에 익숙해지게 된다. 육체의 세계는 보는 눈이 많다. 반대로 정신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애초에 거짓이란 것이 존재할 수 없다. 이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려면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나는 오전에 책 한 권을 읽고 사색에 잠기며 의미 있는 키워드를 마음에 심었고, 잠시나마 정신의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데미안은 인간의 몸을 입은 신적인 존재다. 그의 신비한 행적을 심각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는 정신의 세계가 어떤 식으로 의지를 주고받으며, 또 그 의지가 육체의 세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보여주고자 만들어낸 이야기로 보인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의 만남을 간절히 원한다면 결국은 운명이 그의 곁으로 데려다준다는 내용은, 액면 그대로의 사실이 될 수도 있지만, 정신의 세계 속에서 한 인간의 강력한 의지는 육체적으로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다른 인간의 내면에서 공유될 수 있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인 전쟁의 발발도 집단화된 대립의 의지가 증폭되면서 정신의 세계에서부터 먼저 전쟁이 일어났기에 데미안이 이를 인지한 것이다. 이런 내용 때문에 작가가 영지주의자라는 얘기도 들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교리적 강요는 없다. 대신 중요한 키워드를 명확하게 제시했는데, 데미안이 여러 차례 언급한 '표식'과 '새'이다. 데미안이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표식'으로써 증명할 수 있고, 자기의 인생 과정을 '새'로써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표식
'표식'은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서 받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표식을 두고, 카인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으로 얘기하지만, 데미안은 카인이 획득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 획득인가? 그는 신에게 저항을 한 것이다. 신이 만들어준 모든 환경과 법칙에 순종하기보다는, 이기적 이유든 자유에 대한 의지든, 동생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어 했다. 만약 성경의 이 중요한 사건을 어떤 비유적 예시라고 가정한다면,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아니라 '최초의 반항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반항할 수 있는 내적 힘, 그 자체가 '표식'인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잔혹한 살인마를 두고 '카인의 후예'라고 표현하는데, 오히려 강력한 자기 개척의 의지를 가진 자를 두고 '표식을 획득한 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주 참신하게 느껴진다.
그런 표식의 소유자는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있는 그대로의 인생에 대한 불만이 넘칠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상황에서도, 모두가 칭송하는 상황에서도, 채워지지 않는 그의 마음과 달성되지 못한 그의 목표가 항상 불안하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사람은 육체의 세계보다 정신의 세계를 위해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오히려 정 반대의 상황에서 그는 기쁨이 넘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중이래도, 모두가 그를 비난하는 때라도, 그의 마음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충만함으로 그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표식의 이야기에서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바로 '자식들의 반항'이다. 보통 부모들은 자식들의 순종을 원하긴 하지만, 사춘기와 같은 반항의 시기는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생에 대한 의문은 누구나 갖기 때문이다. 사려 깊은 부모는 그것이 성장의 일시적 과정임을 알기에 자연스럽게 정리되기를 기다려준다. 그러나 좀 더 통찰력 있는 부모는 이 반항을 오히려 반가워할 것이다. 이 반항이야말로 아이가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능력 갖추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자식의 인생이 엇나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동시에, 그의 반항을 주도한 근원을 향해 함께 질문을 던져준다. 자식과 부모 모두가 자신의 공허한 내면을 살펴볼 기회가 될 것이다. 질문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어릴 때 두려워했던 그 공허함보다 더 아래, 진정한 자신의 존재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2. 새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우리의 자신감이나 자존감은 육체의 세계를 어떤 소유물로 채워나간다 해도 완성되지 않는다. 육체의 세계는 늘 비교 우위로 나를 빈곤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신의 세계는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자신만의 의미를 채워나갈 수 있다. 표식은 의미와 가치를 갈망하며 배고파하는 자의 것이다. 표식은 주어진 대로, 시키는 대로 살면서 수동적으로 누리는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며 괴로워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표식을 받은 자의 괴로움이란 자신이 강제적으로 부여받은 이상적인 모습을, 아벨에게 했던 것처럼, 때려서 파괴하고 싶을 정도로 절박한 것이다. 온건한 불교에서도 이런 과격한 표현이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무슨 뜻인가? 눈앞에 보이는 성취,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성장에 현혹되지 마라, 그것이 자신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게 만들면 그 생각조차 죽여버린다는 각오로 돌파하란 뜻이다. 카인이 부여받은 이상은 아벨이다. 유일신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오직 주어진 도덕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카인의 숙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상징인 아벨을 죽여버린다. 선악의 경계에 어정쩡하게 서 있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를 속박하는 세계를 파괴했다. 이것은 악인가? 우리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육체적 세계에서 부와 명예, 권력이 한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듯, 정신적 세계에서도 어떤 벽에 갇히면 더 큰 성장을 못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 고착된 사람을 '교만하다, 아집이 있다, 독선적이다.'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현재 상태에 비판 없이 만족하는 사람은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교만한 셈이다. 우리는 알로 태어나지만 그 알 속에 갇혀 있음을 괴로워할 줄도 모른다면 그저 알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갈 뿐이다. 누구에게나 자기 파괴는 괴로운 과정이지만 그 이후 바깥의 세계를 볼 수만 있다면, 우리의 정신은 새롭게 성장하며 충만함으로 가득 찰 것이다. 날개를 펴는 것은 신을 향해, 즉 이 세계의 진리를 향해 날아갈 준비를 끝 낸 것이다.
이처럼 알을 깨는 것은 그 표현만큼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해당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결코 납득할 수 없던 말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결코 사랑할 수 없었는 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 도저히 집중할 수 없던 일에 집중하고야 마는 것, 불행만이 가득하다고 느꼈던 삶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알을 깨고 나오는 변화다. 그러니 알을 깨고 새가 된다는 것은, 내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나의 오늘만도 그렇다. 이윽고 밤이 되면, 나는 낡고 불행한 오늘의 마음을 죽일 것이다. 잠이라는 죽음의 시간을 거쳐 내일 다시 태어난 나의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나의 세계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충만함과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