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같이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은 이런 사이비에게 걸려들기 딱 쉽다. 그간의 친분, 그 사이에서 형성된 복잡하고도 끈끈한 감정들을 쉽게 떨쳐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외부 발설을 엄히 당부했던 것도 복잡한 감정들에 가리어져 그 나름의 일리가 있다 느껴졌고, 선의를 베풀어주는 이의 부탁은 당연히 따라야 하는 처사라 생각했다. 그간 쌓아온 소중한 우리의 관계를 위해서.
다만, 가족 그것도 남편에게까지 말하지 말라는 건 너무 하지 않나 싶었다. 퇴근한 남편과 하루 일과를 두런두런 나누는 것. 이것은 나에게 있어 하루의 깊은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줄 값진 일이다. 그런데 그걸 하지 말라니. 당연히 따를 리 없었다. 그게 참 다행이었다.
남편은 정신없이 앞만 보고 허둥대는 나를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멈춰 세워주는 사람이다. 늘 그렇다. 내가 감정의 파도에 휩쓸릴 때도, 보이지도 않는 두려움들에 허우적댈 때도 조급하지 않게 멈춰 세워 붙잡아준다. 거짓 상황에 몰입되고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매몰 직전이었지만, 남편은 환기할 수 있는 창구멍을 내주었다. 그 구멍으로 잠시 멈추어 새로운 호흡을 해볼 수 있었다. 물론 당시 의문을 제기하는 남편에게 소름 끼치게도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나였지만, 머릿속에 작은 물음표 한 개라도 품을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남편과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소원했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하기 힘든 상황에 빠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도 못하겠지. 문득 엄습하는 생각에 뼛속 시리듯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