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그런데 그림을 그리라니. 내키지 않았지만 연필을 쥐었다. 머리가 굳어진다. 멍하다. 어떻게 그리지? 잘 못 그릴 거 같은데. 아 잘 그려야 하는데. 그리기 싫다.정말 그리기 싫다. 내가 하기 싫은 건 상담인가. 아니면... 그림인가.
난 미술 전공자다. 한때는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고 그림을 사랑하는 소녀였다. 그런데 입시미술을 시작하며 그림과 사이가 조금 멀어졌다.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림이 한없이 어려워졌다. 이전엔 펜과 종이만 있으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술술 신나게그려냈지만 미대 입시를 겪고 미술 전공을 하고 나서부터는 그림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해지고 잘 그려내야 한다는 압박감은 돌덩이처럼 늘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런데 고작 상담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데도 이렇게 주저하다니. 나 자신이 참 못나보였다. 그러면서도 이런 내 마음을 들킬까 봐 그게 두려웠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초조함 따위는 나와 어울리지 않은 척 애쓰고 애썼지만 마음처럼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주저주저 겨우그려낸 가족 물고기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자주 주저하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을까요?"
이런,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꽁꽁 감춰둔 내 마음을 상담사에게 단번에 들켜버리다니. 발가 벗기듯 무참히 드러난 내 초라함. 부끄럽다 못해 참담했던 마음은 눈물이 되어 콸콸 쏟아져내렸다.정확한 내 눈물의 이유였다.
그 작은 불안의 물고를 시작으로 그간 나도 모르게 켜켜이쌓여있던온 마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씩씩하다 생각했던 그 마음은 한낱 얇은 꺼풀에 불과했구나. 실상 안을 들춰보면 치덕치덕 엉겨 붙어 똘똘 뭉쳐진 우울 뿐이었구나.
"아카씽씨는 심하진 않지만 약간의 우울이 있어 보여요~ 매주 상담하고 속마음을 나누다 보면 분명 좋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제가 도와줄게요"
상담사의 봄날같이 따스한 웃음과 위로는 불안에 오들오들 떠는 마음을 묵직하게 감싸 주었다.
여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제 막 엄마가 된 초보엄마는 그들에게 좋은 먹잇감과 같았고 여지없이 그들의 계획에 말려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