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12. 잉걸

by 삶예글방


우리는 약속했다.


이번 외출을 계기로 정말 필요한 게 뭔지 깨달았다는 그는 자신이 가져와야 할 물건이나 새로 구비해야 할 장비 같은 걸 갖춘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그게 그의 약속이었다.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은 걸린다는 그의 말에 안심했다. 기약 없는 헤어짐을 겪고 난 이후라서 무슨 말이든 달게 들렸다.


나의 약속은 금주, 규칙적인 식사, 11시 취침이었다. 영이 노트 한 장을 찢어 페이지 가득 크게 적은 ‘한의 약속’을 내게 줬다. 이 약속은 자신이 돌아와도 유효한 거라고, 훗날 우리가 다시 집을 분리하더라도 이것만큼은 지켜주었으면 한다고 당부하는 영의 표정이 단호했다. 종이 하단에 볼펜으로 사인하고 냉장고에 붙여뒀다. 밥을 먹어야 할 때 먹고, 물을 마셔야 할 때 마시는 걸 누군가와 합의하는 게, 어린아이가 된 기분 같아서 즐거웠다. 하지만 그 정도로 나는 기저부터 망가져 있었다는 거겠지. 영이 내게 당부한 것들은 어린아이의 단계로 돌아가 사는 법을 다시 배우라는 의미를 내포한 듯했다.


영과의 약속으로 인해 나는 불쑥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싹틔웠다. 맥주, 소주, 아주 가끔 마셨던 위스키병까지 모두 처리하고, 퇴근 후 곧장 집에 돌아와 청소하고, 오래되어 쓰지 못하는 물건을 내다 버렸다. 퇴근길 버스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대신 책을 읽었다. 처음엔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참 같은 페이지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종이를 펼쳤다는 데 의의를 두며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글자를 붙잡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소설 속 인물이 모순적인 사랑의 감정에 고통받고 있는 장면을 읽으며 다시금 원이 너무 그리웠다. 누구를 붙잡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와 원이 한참 싱싱한 사랑을 자랑하고 다닐 때 가장 자주 만났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원의 부고 이후로도 간간이 안부를 묻던 친구였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자, 그 친구는 마치 몇 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 ‘그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으겠다고 화답했다. 친구의 기쁨과 상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짧은 통화까지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습관처럼 집의 온갖 방과 창문을 열어젖혔다. 다음 날, 새로 생긴 단톡방 알림이 온 걸 확인한 후 나는 빗장 문을 닫지 않은 채로 출근했다.


가장 고전했던 부분은 밥을 삼시세끼 챙겨 먹는 거였다. 우선 ‘삼시’의 정확한 구분도 어려울뿐더러 ‘세끼’ 미션을 달성하려면 무척 부지런해야 했다. 출근길 버스에서 아침을 가장한 바나나, 샌드위치 등을 간단하게 먹고, 점심은 사내 식당을 이용했다. 퇴근 후 저녁엔 집의 잡무를 처리하느라 바빴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기에 무얼 먹기도 애매했다. 3~4일을 대충 보낸 후 영에게 연락했다. 삼시 세 끼는 어려우니 삼시 두 끼로 합의를 보자고. 대신 아침은 꼭 먹겠다고. 영이 곧장 답했다. ‘알겠어. 그래도 저녁에 사과라도 먹어.’


생각보다 일찍 잡힌 친구들과의 약속을 나가기 직전, 나는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나의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기 위해 안절부절못했다. 나가기 직전 지갑, 약간의 현금, 손수건 등 각종 소지품, 혹시 몰라 챙긴 반창고와 연고 같은 것도 가방에 잘 담겨있는지 수시로 체크했다. 머리카락이 너무 푸석한 것 같아 에센스를 덧바르다 되레 떡진 머리칼을 어떻게든 정돈하기 위해 미친 듯이 빗질을 해댔다. 옷매무새를 몇 번이고 고치고, 외출하고서도 거울만 보이면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빠르게 훑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눈에 띌수록 이상하게 코트 소매에 삐죽 튀어나온 실밥 한 가닥을 쥐어뜯고 싶었다.


술집으로 들어서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 몇 명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지하철에서 오는 내내 긴장했던 것과 달리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테이블의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그날 저녁 내내 나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친구들을 위해 목소리를 키우고, 친구들은 질문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날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나였다. 영의 이름은 잘 등장하지 않았다. 이들은 영을 잘 몰랐고, 놀랍게도 영이 인터뷰했던 매거진의 기사를 통해 그를 알고 있는 친구도 없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동거하고 있는 안드로이드가 영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나서야 테이블이 술렁였다. 그럼 ‘그 밥 2인분을 꼬박 먹는 동거인’이, 안드로이드한테 밥상 차리라는 진상 인간이 너였냐며 황당해하는 친구들에게 말을 얼버무리자 다들 비난했다. 어떻게 원이랑 살았으면서 안드로이드를 부려 먹냐. 이 모임을 주도했던 친구가 말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원이가 들으면 하늘에서 데모용 피켓 들고 쫓아온다느니, 나중에 죽으면 무슨 원망을 들을지 모르니 절대 원이는 찾아가지 말라는 친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했다. 술이 약한 친구가 나서서 팔뚝질 하는 원이를 흉내 냈다. ‘안드로이드한테 밥 차리라는 인간을 내 집에서 추방하라!’고 외치며, 원이 특유의 결연한 표정을 짓는 친구의 모습에서 원이 겹쳐 보였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몸을 못 가누며 웃음의 여운을 즐기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친구에게 기대어, 아무렇게나 과거의 이야기를 들먹이고, 비꼬고, 폄하하고, 그리워했다.


친구의 자취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던 중 원이 만들었던 안드로이드 해방 물결 배지가 여전히 그 애의 가방에 달린 걸 보고 눈물을 쏟았는데, 도저히 멈추질 않아 당황했다. 남의 가방을 끌어안고, 바닥에서 엉엉 우는 내 등에 친구 한 명이 기댔다. 누군가는 같이 울고, 누군가는 조용히 내 울음을 들었다. 울다 지친 나는 친구의 러그 위에서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친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숨죽이려고 노력하다 못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잠든 내가 일찍 눈을 떠 배달을 시켰다. 근처에서 배달이 가능한 비건 음식은 샐러드뿐이었기에 샐러드로 다 같이 해장했다. 퉁퉁 부은 눈을 보고 친구는 새벽에 얼려뒀다며 숟가락 두 개를 냉동고에서 꺼내줬다. 집에 돌아갈 즈음 의무라며 셀카를 찍고, 다음 약속을 잡고, 헤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동안 술자리 내내 들었던 노래 한 곡을 들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훅 끼치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열어둔 채로 외출하는 바람에 집안은 바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씻고 나온 나는 그대로 이부자리를 펴고 다시 잠을 잤다. 오랜만에 잊고 지냈던 악몽을 꿨다. 쫓기고, 쫓기다 궁지에 몰려 거울에 비친 나를 확인하면 나는 내가 아닌 영의 모습을 한 꿈. 자다 깨는 걸 반복하다 정신을 차리니 월요일. 영이 돌아오기로 한 날이 되었다.




“이게 뭐야?”


돌아온 영은 양팔에 안기도 버거울 정도의 박스를 방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당황해서 박스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 근처를 서성였다. 영은 메고 있던 배낭에서 온갖 짐을 다 꺼내어 설명했다. 간단한 옷가지부터 최근에 새로 출시됐다는 휴대용 보조배터리 모델, 안드로이드 실리콘 피부용 보습제 등 생각보다 사고 싶었던 물건이 많아서 짐이 무거웠다는 영의 옆에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맞은편에 우두커니 서서 초조한 표정을 지은 날 본 영은 자신의 짐을 한쪽으로 멀리 밀쳐두고 내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박스가 좀 오래돼서 더러워졌더라고.”

“어디서 가져온 건데?”

“본가에서.”

“본가는 안 간다고 하지 않았어?”

“다른 것 말고 딱 이거 하나만 맡아달라고 부탁했었어. 일주일이나 걸린 이유도, 오랜만에 뵙게 된 거라 예의를 차리고 싶었거든.”

“......”

“그래서 이게 뭔지 궁금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영이 박스 뚜껑에 손을 올린 채로 나와 오래 눈을 맞췄다.

“이걸 설명하려면 나한테도 용기가 필요했어.”

“왜?”

“나한테도 소중한 것들이라, 남한테 절대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었거든.”


영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가 뱉은 숨에 내 머리칼이 작게 흔들렸다. 그래도 너한테는 보여주는 게 맞는 것 같아. 영이 천천히 박스 뚜껑을 열었다. 빽빽하게 찬 노트, 각기 다른 모양의 크고 작은 상자들, 두 줄 넘게 쌓인 편지가 담겨 있었다. 짧게 훑어보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긴장한 것도, 속상한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의 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이건 영의 것이 된, 원의 흔적이라고.


“다 열어봐. 특히 편지.”

“내가 왜...”

“그래야 원이 마음을 알 수 있을 거야.”


팔로 무릎을 감싼 채로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시간의 흐름이 그대로 담겨, 박스에 밀봉되었던 상태 그대로 모든 것이 완전해 보였다. 내가 꺼내는 순간 감당해야 할 게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원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들이라고 했지만 한편으론 영이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라고도 했다. 내가 들춰보게 될 게 영의 인생일지 원의 마음일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건 애초에 구분이 되는 걸까?


다시 고개를 들고 영과 눈을 맞추자, 영이 씩 웃었다. 괜찮아. 널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어. 마치 원처럼 미소 지은 영이, 가장 끄트머리의 편지를 꺼내 펼쳤다. 분홍색의, 연필심이 번져 꼬질꼬질한 편지지, 그 속에 가득한 원의 필체. 갑자기 코끝이 시큼했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영이 다시 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이건 이렇게 열어둘 테니까 네가 보고 싶을 때 봐. 난 이제 씻을게. 영이 알콜스왑과 보습제를 챙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화장실 안에서 영이 튼 노래가 문틈 사이로 퍼졌다. 한참 망설이던 나는 영이 건넸던 편지를 다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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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