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자리

#13.

by 삶예글방


20xx. x. xx


영이에게.


손 편지 쓰는 게 오랜만이다. 우편함이 있는 식당이라서 다행이야. 적응은 잘했어? 뚝배기나 뜨거운 그릇 만지면 실리콘에 손상 갈까 봐 걱정되네. 체크카드에 돈 옮겨 놨으니까 그래도 병원비는 걱정하지 말고......

아무튼 잘 지내! 답장은 안해연으로 보내주라. 거기 카페 1층 알바랑 친해졌어. 내 짐 대신 맡아준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건강해.






아니 벌써 다쳤다고? 답장 읽자마자 검색해 보니까 근처에 A/S 센터 없던데. 함부로 치료받으러 오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내가 다 미안하다. 혹시 몰라서 바느질 세트 보내. 골무도. 이거 끼고 일하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서.



거기에도 비건 식당이 있다니, 신기하다. 나한텐 좀 낙후된 지역이라는 안 좋은 인상이 있거든. 그래. 어딜 가나 비건은 있는 법이지! 그 식당 사장님이랑 친해져 봐. 어쩌면 내 이름 알고 계실지도 몰라. 아.. 위험하려나?



한이랑 나는 비건 하게 된 지 꽤 됐어. 한이는 나랑 사귀기 한참 전에도 비건이었고, 나는 플렉시테리언이었다가 한이 만나고 페스코부터 천천히 시작했지. 완전 비건인 너는 식생활을 바꾸는 어려움이 뭔지 모르지? ㅋㅋㅋ미안해. 근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야. 길고양이는 너무 귀엽고 안쓰러워서 미칠 것 같은데, 고기로 퉁치는 생명은 먹기 위해 사육까지 한다니.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드로이드도 마찬가지였지. 목적을 위해 태어나는 생명이 어딨겠어. 아직도 영화에선 ‘살인 병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그리는데. 그니까 다들 무서운 거야. 사실 사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게.



한이랑 같이 사는 건 재밌어. 너는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랑 부대껴야 하니까 공감은 안 되겠지만. 한이 덕분에 나는 드라마나 영화도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는 재미도 알게 됐어. 열 번씩 같은 영화를 돌려보는 게 솔직히 재미없을 때도 있는데, 그럼에도 새로운 이유를 찾는 걸 보면 신기하다니까.


오늘은 광화문에서 시위가 있었어. 요새 자꾸 폭력시위 조짐이 보여서 무서워. 그런 얘기 먼저 듣고 한이한텐 나오지 말라고 했어. 잘 지내지? 갈수록 혐오의 목소리가 높아져서 큰일이야. 이 시대에도 끝은 올까?




오랜만이야.

아픈 덴 없지? 한동안 답장 못 해서 미안해. 사실은 과외 잘렸거든. 그 여파가 좀 오래갔어. 별일은 아니고, 학부모가 방해하는 바람에. 이참에 인스타도 잠깐 비활성화했어. 보고 있으면 너무 머리가 아프더라고.

그래도 요새 잘 지내. 한이랑 시위 나가기도 하고, 밥도 잘 먹고, 여전히 웃고 떠들면서... 마음이 좀 우울하기도 한데, 한이가 나 웃기는 재주가 있거든. 요새 그냥 같이 누워서 예능 보고 있으면 머리가 텅 비어. 그런 시간을 좀 많이 가졌어.



영아. 가끔은 진짜 지쳐. 난 안드로이드 당사자가 아닌데도 이렇게 힘든데, 타지에서 지낼 너 생각하면 마음이 깜깜하기도 해.

사실은 내가 안드로이드 인권 의식을 갖게 된 게 엄청난 사명감은 아니었거든. 한이랑 처음 알게 됐을 때, 걔 이상형이 남을 위해 올곧게 행동하는 사람이 좋다고 해서.. 독서 모임이랑 동아리 같은 거 같이 하다가 자연스레 알게 됐거든. 얼마나 이 사회에 혐오가 만연한지. 지금은 내가 시위에서 스티커도 만들고, 운영진에도 소속되기도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사실 이걸 다 시작했던 건 내가 주변에서 보고, 듣고, 아는 걸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랬어. 한창 시작할 때는 진짜 무슨 폭주 기관차처럼 앞만 보고 달렸는데 요새는 왠지 나 혼자 걷고 있는 것 같고, 친구들도 다들 취업하고 그러니까 더 바빠지고. 모르겠다. 그래도 난 너 때문에 버텨. 알지?




영아!! 나 오랜만에 길 가다가 그때 써브웨이 사장님 봤다!! 너 여기 돌아오면 셋이서 같이 술 마시러 가자ㅋㅋㅋ너 못 마셔도 그냥 같이 가주라





한이랑 싸웠어.

너무 속상한데, 이해를 못 하는 게 아니라서 더 슬퍼. 너한테 카드랑 신분증 넘겨준 거 왜 그랬냐고 차라리 대놓고 물으면, 본인 마음이 더 편할 텐데 내 생각을 해서 말 못 하는 게 다 보여.

잘 지내? 답장이 없네. 사실 답장 안 해도 돼. 그래도 생각나면 답장해 줘.



우리 맨날 일기 쓰고 농땡이 피웠던 카페 기억나? 거기 문 닫았더라. 너무 아쉬워. 내 추억이 다 사라져~







그랬구나. 왜 답장 없냐고 물어봐서 미안(너는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겠지만). 생각해 보니까 너도 많이 정신없겠다. 나인 척도 해야 하니까. 너 내 표정 까먹은 거 아니지ㅋㅋㅋㅋ나중에 돌아와서 내 흉내 얼마나 잘 내는지 보여줘. 한이도 너 보면 좋아하겠다. 아니다... 너랑 한이랑 친해질 수 있을까? 내가 볼 때 한이는 너 성격 못 견뎌. 되게 섬세하고 좀 혼자 파고드는 구석이 있거든. 완전 내향인이라서 아마 둘이 친해지려면 내가 엄청 고생해야 할 것 같네. 그래도 재밌겠다. 우리 셋이 노는 거.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보고 싶다 친구야!



요새는 별다른 근황 없어. 맨날 시위 나가고, 사람들 붙잡고 서명 전단 돌리고, 늦게 들어가서 한이랑 자주 싸워. 너 때문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먼저 한이한테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데, 좀 무서워. 먼저 말 꺼내면 헤어지자고 할까 봐... 요새 좀 시한폭탄 같아. 내 감정기복이. 왜 그런지 모르겠어. 잠도 엄청 자는데, 깨어있는 시간엔 계속 밖에 나가려고 하는 것 같아, 최근엔.


아냐. 너 도와준 거 절대 후회 안 해.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네가 자연 태생 인간처럼 살 수 있도록 도운 건 내가 세상에서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야. 그 생각은 죽을 때까지 안 바뀔 거야. 근데 요새 날 제일 힘들게 하는 건, 너를 도우려고 내 삶을 똑 떼줬던 걸 한이한테 말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야. 이렇게 한이가 불안해하고 힘들어할 줄 몰랐어. 내가 너무 무조건적인 이해만 바랐어. 그게 너무 미안해서 미칠 것 같애. 맨날 악몽 꾸는지 자다가도 울고 그러는데, 그 고통을 내가 준 거니까. 스스로 용서하기가 좀 힘드네...

그래서 자꾸 시위에 매달리게 돼... 영이 네가 마음 편히 돌아올 날이 가깝길 바라서.. 한편으론 너무 무섭기도 해. 생활비 때문에 한이도 추가 근무를 하거든. 마주치는 시간이 짧다 보니 감정의 간극이 커지는 느낌인데, 이걸 좁히기가 쉽지 않네. 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번에 옮긴 곳은 어때? 저번처럼 냉방기도 안 틀어주는 곳은 아니지? 사람들도 다 착했으면 좋겠다. 배터리 단자 고장 났다는 부분은 어떻게 고쳤는지 알려줘. 잘 지내.





영아 미안해.. 나 요새 글 쓰는 게 좀 힘들어서...

그냥 생활하는 게 여러모로 힘들어. 의욕도 없고. 사람 만나기도 싫고. 너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위에 문장도 한 달 전에 쓴 거네. ㅠㅠ너 잊은 거 아니야.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냥 좀 우울해서 요새 여러모로 쉬고 있는데, 생활 패턴이 쓰레기가 됐어. 나 진짜 널브러져서 막사는 데도 한이는 날 버리질 않네... 한이 말고 만나는 사람도 잘 없어, 요새. 먹는 거, 입는 거, 머리 잘라야 하는 거, 화장품 새로 사야 하는 거 등등 진짜 사소한 것까지 다 챙겨주고 신경 쓰고 지켜주면서 지내. 맨날 유튜브만 보니까 기억력도 안 좋아져서 자꾸 이것저것 까먹거든. 나 때문에 한이가 너무 힘들 것 같아. 너무 미안해. 근데 미안하다고 말하면 사과하지 말래... 그럼 나 뭘 해야 하지... 아무것도 모르겠어.






영아. 아픈 덴 없지? 체크카드에 돈 넣어놨어. 보조배터리 새로 사. 맘 같아선 그냥 너한테 집도 해주고 싶은데 내가 그럴 능력이 안 돼서 미안하다ㅋㅋㅋ좀 봐줘.



영아. 나 요새 백업 시스템 이것저것 알아보는 데 너 혹시 들어본 거 있어? 혹시라도 누구한테 들으면 나 알려주라.



이번에 시위 나가서 한 대 얻어맞고 왔어. 근데 내 앞에 어떤 학생도 같이 맞았어. 사람들이 시위 나갈 때 혹시 모르니까 마우스피스 끼고 가라는 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여기는 요새 분위기 흉흉해. 거긴 그래도 이런 대규모 시위는 없지? 조심해.



너 친구 너무 많이 사귀지 마. 나 요새 사람 이름 잘 못 외워. 나중에 소개받았을 때 이름 헷갈리면 어떡하냐.






영아~ 잘 지내지? 아프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영아 나 답장하는 거 까먹었




ㅋㅋㅋ웃기다. 아마 저 때 불 올려놓느라 쓰다 만 것 같은데 또 까먹었네. 내가 요새


요새 이래. 근데 이젠 안 웃겨. 영아. 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모르겠어.







영아 잘 지내?


아픈 덴 없지?







영아.

오랜만에 병원 갔다 왔어. 뇌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우울증이래. 좀 이상하긴 한 것 같아. 별로 안 놀라운 걸 보니까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도...

약 받아온 지 며칠 됐는데, 귀찮아서 사실 잘 안 먹었어. 니가 잔소리 하겠지만...

전에 내가 백업 시스템 물어봤던 거 기억나?

내 기억이 너무 많이 소실되는 느낌이라서 그냥 얼기설기 물리적으로 갖고 있으면 나중에 도움이 될 것 같애. 서비스 신청해서 비상금 다 털어서 백업해 두고 왔어. 그래도 이거 하느라 오랜만에 광화문 말고 다른 곳에도 나가고, 좋았네.

요샌 한이가 무슨 말을 해도, 다 기억이 안 나서 제대로 답을 못 할 때가 많아. 예전에 뭐 했었는지, 뭘 먹었고, 어딜 갔었고. 난 그런 기억 때문에 힘들어도 한이 생각하면서 버텼는데. 그것까지 흐려지니까... 그냥 내가 날 다 잃어버린 기분이야. 지난 시간이 꼭 얼룩처럼, 그 자리에 뭐가 있었는지 알겠는데 형태만 남고 형체는 사라져. 그냥 뭐라도 붙잡고 싶은데 나한테 닿는 순간 공기처럼 흩어져 버리는 느낌... 내가 아주 투명해지는 듯해.

영아. 이런 말 하면 니가 걱정하겠지만.. 병원에선 심각하다고 하니까 혹시 몰라서 말할게. 내가 안 좋은 선택을 해서 이 편지가 끊기면, 아마 한이가 많이 괴로워하고 있을 거야.

내 노트북 비번 아래 적어둘게. 거기에 기억 백업한 파일 저장해 뒀어. 그땐 네가 이 기억 좀 심어서 한이 좀 챙겨주라. 한이한테는 이런 거 다 비밀로 해줘.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 하지...? 그래도 이번만 부탁할게.

근데!!!!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임. 왜냐? 너 돌아오는 거 봐야지.

밖에 나가는 게 좋다고 해서, 오랜만에 시위도 나가려고.

잘 지내. 답장 꼭 해.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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