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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r 01. 2024

사과꽃

格物




내가 초록 동물들과 친해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연희였다. 여기서 초록 동물은 식물을 말한다. 식물은 알수록 동물이다. 매일 움직이는 데다 세상 누구보다 멀리 짝짓기도 한다.


연희는 내게 냉이 캐는 법을 가르쳤다. '알려줬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린 날 한 나절의 기억이 지금까지 생생한 가르침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밭상수훈'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냉이는 웃긴 식물이었다. 잘 뽑히게 생겨가지고는 쉽게 뽑히지 않았다. 와중에 잘 안 뽑히게 생겼는데 잘 뽑히는 것보다는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잘 안 뽑히는 놈일수록 뿌리에서 달근 씁쓸한 풍미가 났는데, 그 맛은 뿌리의 가장 두터운 부분과 초록이 만나는 곳에서 나왔다. 뿌리가 얇은 것들은 중심부에서 '그렇다 할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냉이를 손으로 직접 캐 본 일. 그것은 내가 캔 냉이와의 개별적 교감이라기보다는 온 세상 초록 동물들을 동시에 만난 사건으로 각인되었다.



오늘 산책하다 찍은 사과꽃이다. 나는 사과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지만 이게 사과꽃임을 안다. 작년에 여기 사과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한 동네를 거의 6년째 돌아다니다 보니 동네 식물도감을 그릴 지경이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꾸 바라보면 문이 열린다. "이 꽃은 사과꽃입니다!"하고 소리칠 수 있는 시점이 오는 것이다. 축하할 일이다. 그래서 소리는 속으로만 치고 사진을 찍었다. 격물格物하다보면 개물開物이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지만 <동물지, Historia Animalium>를 저술함으로 생물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깊이 바라보는 자였다. 누구나 자꾸 오래 바라보면 저런 책을 쓸 수 있다. 더 심한 책도 쓸 수 있다.



무슨 사과꽃인지 궁금해서 굳이 또 찾아본다. '안나'란다 세상에. 미국에선 '애나'겠지. 애나도 안나도 예쁘다. 어딘가 '연희'와도 비슷한 결이고. 연희는 내게 격물을 가르친 첫 스승이다. 연희 덕에 그날의 냉이가 오늘의 사과꽃으로 이어진 것이다. 연희는 내게 생명도 주고 이런 것도 가르쳐 주고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연희이자 안나이자 사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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