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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y 18. 2024

수박 고르기

有孚




거나하게 늦잠을 자고,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구운 야채와 고기 조각을 데워 테이블 위에 놓는다. 냄새를 맡은 남편이 자연스레 앞접시를 들고 착석했다. 일찍 일어나 배고픈 모양이었다.


"아니, 어제 진짜... 유나 애기 인간적으로 너무 안 귀엽드나?"


"어."


"귀여운데, 한나절 들고 놀았더니 세수하는데 팔 떨리드라."


"나."

('맞나'의 수백 가지 용례를 배우고 드디어 써먹는 남편)


"어! 맞아! 이럴 때 쓰는 거야! 근데 지금처럼 '맞'을 너무 세게 하면 곤란해. 영화에 나오는 가짜 경상도 억양 같거든. 힘을 좀 빼줬으면 좋겠어."


"맞나."


"어! 좋아."


경상도말을 잘하고 싶은 한 미국계 일본인의 '맞나'를 들으며, 포크로 가지 속살을 살살 발라 입에 넣는다. 중국가지다. 메뉴에 따라 가끔 인도 가지나 프랑스 가지도 종종 사 오지만 한국 가지는 찾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먹던 가지에 가장 가까운 맛은 중국 가지인데, 한국산에 비해 어딘가 남편의 '맞나' 같은 씨알 빠진 맛.


"아니, 내가 어제 수박 고르는 법 설명하다 만 부분 있는데 마저 들을래?"


"어!"


"그거랑 이민국 심사 무난하게 통과하는 법이랑 연관시켜서 말할 건데 관심 있나?"


"엌ㅋ"


"수박 고르기는 수박 섹션으로 걸어갈 때 이미 시작되는 거야. 그때부터 마음을 비우고, 그 섹션에서 제일 맛있는 수박을 먹고 싶다는 작은 소망만 품어. 그리고 두드릴 때는 절대 꿀밤 때리듯 하지 말고 손목에 힘 풀고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처럼 휘리릭. 한 수박 두 번 치지 말고, 그리고 너무 여러 개 쳐 보지 말고, 서너 개 정도만 두두둥."


"그래서 맛있는 수박 소리가 어떤데?"


"청량해."


"왜 두 번 치면 안 돼?"


"그건 수박과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행위거든.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믿음은 사람 간의 믿음(信) 말고, 어미새가 새끼에 대해 '알 깨고 나오겠지?' 하는 당연한 믿음(孚)이야. 봄이 가고 여름이 오겠지 하는 믿음. 맛있는 수박이 내 손에 얻어걸리리라는 믿음.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오늘 맛없는 수박을 먹게 될지라도 응당 그럴만해서 그렇겠지 하는 믿음.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어떤 수박도 나를 번뇌에 빠트릴 수 없음을 미리 알고,  수박 섹션으로 애초부터 의연하게 걸어가는 믿음."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수박 고를 일이야?"


"이게 뭐가 심각해. 맛있는 수박 먹고 싶은 사람이 이 정도도 안 할라고?"


"근데 왜 서너 개 만 두드려보는 거야? 많이 해 보면 좋잖아."


"그건 좀 궁색하잖아. 궁색한 사람한테 영감이 오겠니? 판단만 흐려지지."


"이민국 심사와의 상관성은?"


"말했잖아,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휘리릭."




나는 우리 조카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맛있는 수박을 고를 줄 알고, 각국의 이민국도 바람처럼 잘 통과하는 그런 어른으로 자랐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멈출 수가 없다. 종이 자르고 구멍 뚫고 제목 써 붙이고 하다 보면 마음이 맬개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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