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 작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나요?"
"지금이요."
"네?"
"지금 기자님과 이야기하는 이 순간이요. 우리가 만난 거요."
진심이었다. 내가 글씨를 쓰지 않았더라면 무슨 수로 이런 공통분모 없는 청년과 실버레이크 저수지에 앉아 글씨에 대한 수다를 떨 수 있을까. USC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던 한 학생이, 작년 한글날 내 행사를 우연히 구경하다 글씨를 하나 받아 자기 방에 걸어 놓았다. 그걸 쳐다보던 어느 날 문득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 디엠을 보냈는데 운 좋게 나도 그녀의 얼굴이 기억나서 성사된 만남이었다.
인턴으로 일하는 로컬 신문사에 한글 캘리그래피 관련 기사를 작성 중이라고 했는데, 나 말고 다른 한국계 캘리그래퍼도 인터뷰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요즘 누가 신문을 볼까 싶으면서도 그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나는 내 조카들 또래의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할 때가 많기에, 그녀의 의도와는 다른 이유로 인터뷰 요청에 응한 것이다.
글씨를 쓰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에 찾아온 귀한 인연의 반 이상은 놓쳤을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다른 인연이 닿았겠지만 지금의 모습은 아니겠지.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슬프다. 뭐 대단한 성공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지금이 자연스럽고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나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 스위스에서 나비체를 만들었고, 2004년부터 글씨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길에서 글씨 쓰며 부족하나마 여행 경비는 벌었지만 2004년이 공식적인 출발점이었다. 그때부터 20년 정도 글씨를 쓰다 보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엮이게 되었고, 그 덕에 내가 어떤 식으로 모가 난 사람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냥 재미로만 쓸 때와는 다른 배움이 있었고, 둘 다 유익했다. 하나의 부탁이 어디까지가 당연하고 부당하다고 느끼는지, 어느 지점에서 감동이나 화가 올라오는지, 혼자 했으면 알 길이 없는 나의 면모들을 자꾸 마주하며 여행에 버금가는 감각 경험과 배움을 얻었다.
글씨를 쓰는 행위와 그것이 불러들인 것들은 나를 구축하면서 구심력 있는 인간으로 만들었다. 그 힘에 끌려 들어오는 사람들과 놀다 보면 전에 없던 글씨가 나오기도 하였고, 그러다 보니 세상 게으르고 끈기 없는 내가 20년째 이걸 해 오고 있다. 어릴 적 우리 선생님한테 글씨 배울 때만 해도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조카들과 또래 친구들이 뭐가 됐든 덕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운 좋게 덕업일치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본업 외에 사람들이 나에게 기댈 수 있는 하나의 분야를 꼭 지녔으면 좋겠다. 내 분야가 있다는 것은 줄 게 있다는 말이고,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결핍이나 불안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못 받아서 서운한 마음보다는 더 못 줘서 미안한 사람으로 나아간다. 나의 분야를 통해 주는 것과 그냥 주는 것의 다른 점이 있다면 스스로 고갈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하나의 분야는 무엇보다 나를 제일 먼저 살리기 때문이다.
분야를 고르는 데 있어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은은히 관심이 가거나, 자연스럽다 여겨지면 충분하다. 열정적으로 뭘 해야 한다는 이상한 자기 계발서적 믿음에서 벗어나 잔잔하게 무언가를 오래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자연이 깊이가 생기고, 나의 깊이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을 통해 내 모습을 알게 되면서, 내 눈에만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본의 아니게 보여줄 수도 있다.
"아니, 어쩜 얼굴에 모든 인종이 다 들어있어요? 정말 묘하게 아름다운 얼굴이네요. 크리슈나(비슈누 아바타라 중 하나) 닮았어요! 물론 칭찬입니다."
"정말요? 가끔 태국 사람 같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데 '모든 인종설'은 또 처음이에요(웃음). 오늘 인터뷰 시간 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 쇼는 언제예요?"
"목요일 다운타운에서 해요. 시간 되면 놀러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