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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20. 2021

[헌정/리메이크 앨범 4] 신중현 다시 부르기

VA [A Tribute to Shin Joong Hyun 1997]

<사회평론 길>이 후원해 2017년 발매된 [트리뷰트 신중현] 한정판 넘버링 LP미니어쳐. 내가 가진 것은 넘버링 '24'번이다.


이 땅에 서구 대중음악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군계일학의 음악적 노선을 구축하며 당대 트로트와 포크 시장의 틈바구니에서 뛰어난 시장성을 이미 개척했던 이 거장은 지금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외길 음악 인생을 묵묵히 가고 있다.

[트리뷰트 신중현(A Tribute to Shin Joong Hyun 1997)] 속지에서


틀렸다. 신중현은 “이 땅에 서구 대중음악을 들여놓”은 사람이 아니다. 이 땅의 서구 대중음악을 말하기 위해선 신중현이 태어난 일제 강점기 창가와 찬송가, 채규엽과 김해송, 손목인과 반야월을 먼저 짚고 가야 한다. 일본 엔카와 뒤섞이면서 “당대 트로트”를 낳은 서구 대중음악은 신중현이 공식 데뷔한 1959년 훨씬 이전부터 이 땅에 있었다.


그러니 신중현의 업적을 말하기 위해선 좀 더 구체적인 ‘장르’를 얘기해야 한다. 이렇게 바꾸면 되겠다. 신중현은 “이 땅에 서구 록과 솔(Soul)을 본격 소개한 거장”이라고 말이다. 이 앨범 [트리뷰트 신중현]은 바로 그 거장에게 바치는 후배 뮤지션들의 진심어린 음악적 존경, 거인을 기리기 위해 머리를 맞댄 진지한 음악적 고찰이다.


이 작품은 원래 더블 앨범이다. 한 장엔 강산에가 부른 ‘바람’을 포함한 일곱 곡이, 다른 장엔 이은미가 부른 ‘봄비’와 참여 뮤지션들이 하나 돼 부르고 연주한 ‘아름다운 강산’까지 아홉 곡이 들어 도합 열 여섯 트랙이 자리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리뷰할 CD는 한 장 짜리다. 그러니까 원작이 나오고 20년이 지난 2017년, 한정판 넘버링 LP미니어쳐로 발매된 버전이라는 얘기다. 음반이 두 장에서 한 장으로 줄면서 곡 수도 열 여섯에서 열 하나로 줄었다. 누락된 곡은 신중현의 아들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의 ‘꽃잎’과 퀘스쳔스(Question’s)의 ‘즐거워’, 신중현이 직접 연주한 ‘미인’, 사랑과 평화가 선택한 ‘잊어야 한다면’, 그리고 논 피그(Non-Pig)가 매만진 ‘너만 보면’이다.(이 곡들은 마음만 먹으면 스트리밍 사이트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다.) 트랙 배치도 달라져 기존 더블 앨범의 문을 연 강산에의 ‘바람’은 이중산이 해석한 ‘꽃잎 (Inst.)’에 밀려 아홉 번째에 배치 됐다.


참여한 뮤지션들은 장르 상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록과 재즈, 그리고 블루스. 당시 메이저 신을 이끌던 아이돌 댄스 그룹들과 알앤비/솔, 발라드, 트로트 가수들, 그리고 기지개를 켜기 직전이었던 랩과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들은 이 프로젝트에서 조용히 배제되었다. 그만큼 먼 선배이고 먼 취향이었던 탓일까. 헌정의 색깔을 규정한 장르적 결속은 결국 헌정의 의미에 깊이를 더할 수도 있었을 ‘해석의 다양성’을 포기한 모양새로 남고 말았다. 이 앨범보다 5년 앞서 현진영이 샘플링한 ‘미인’과 ‘봄비’, 이 앨범이 나오고 4년 뒤 김건모가 리메이크 한 ‘빗속의 여인’ 같은 사례들이 못내 아쉬운 이유다.


선곡은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목경이 다듬은 에드 훠의 ‘빗 속의 여인’(1964)과 이정화가 마이크를 잡은 덩키스 시절 ‘꽃잎’과 ‘봄비’(1969), 김추자가 부른 ‘나뭇잎이 떨어져서’(1969) 정도를 빼면 대부분 70년대 신중현의 그림자를 좇고 있다. 1971년 임아영이 부른 ‘미련’, 이듬해 장현이 노래한 ‘석양’, 같은 해 더 맨의 박광수가 부른 ‘아름다운 강산’이 거기에 속한다. 하나 흥미로운 건 1972~3년에 걸쳐 김정미가 부른 세 곡이 이 앨범에서 무더기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신중현의 장르라 할 만한 ‘사이키델릭 솔’을 구체적으로 들려준 김정미의 목소리는 한영애(‘봄’)와 류금덕(‘햇님’, 류금덕은 그룹 복숭아의 멤버로 대중에겐 이원진과 함께 부른 ‘시작하는 연인들을 위해’로 잘 알려져 있다), 강산에(‘바람’)의 저마다 개성있는 창법 아래 재조명 되었다. 이른바 ‘대마초 사건’으로 긴 시간 침묵한 신중현이 다쉬 뛴 80년대는 윤도현 밴드(YB)가 ‘이제 그만 가보자’(1983)로 유일하게 되짚고 있다. 윤도현은 이 노래를 부르고 2년 뒤 자신들의 리메이크 앨범에서 ‘바람’을 새로 부른다.



우선 연주곡들이 눈에 띈다. 시작은 기타리스트 이중산의 ‘꽃잎 (Inst.)’이다. 이중산의 ‘꽃잎’은 높고 애절한 이정화의 노래를 증발시켰다. 원곡을 휘감은 올갠과 현악의 탁한 분위기도 이중산의 연주에는 없다. 대신 그는 슈라프넬 레코드(Shrapnel Records) 마니아들이 반길 만한 하드록 기타 연주로 저 모든 부재를 위로한다. 이중산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이재훈)을 뺀 모든 연주(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 모듈)를 홀로 해내면서 가장 밀도높은 개인적 헌정을 앨범 머리에서 선보였다.


피아니스트 김광민도 김추자의 ‘나뭇잎이 떨어져서’에 자신만의 메스를 댔다. 이중산의 것과 마찬가지로 이 버전에서도 김추자의 터프한 몸짓과 걸죽한 창법은 김광민의 조용한 재즈 사유 앞에서 물거품이 된다. 마치 티나 터너를 빌 에반스가 연주한 느낌이랄까. 그는 “기존 규칙이나 테크닉에서 자유로워질 때 음악은 창조의 순간을 맞이하는 법”이라고 한 어느 재즈 평론가의 말을 이 연주에서 정확히 증명해내었다.


신중현을 향한 재지한 접근은 한상원과 정원영이 건든 ‘석양’에서도 들을 수 있다. 연주자이자 교육자이기도 한 둘의 느슨한 합주는 재즈 퓨전의 따뜻한 맛을 머금어 터벅거리는 프로그래밍 비트 위를 속박없이 떠돈다. 장현이 부른 원곡에 비해 이들의 리메이크는 사운드 질감 면에서 제법 두터운 거리감을 유지한다. 여유와 여백이 두루 녹아있다.


그렇다. 이 헌정 앨범은 사실 30년에 가까운 세월의 소리 간격(차이)을 좁히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부르고 연주한 당사자가 곡 단위로 직접 사운드 디자인을 통제했다는 사실은 그걸 잘 말해준다. 그뿐인가. 난장 스튜디오(난장 Recording Studio) 정도를 빼면 겹치지 않는 녹음 장소와 엔지니어 명단도 이 앨범이 트랙 단위로 얼만큼 공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가령 빛과 소금의 박성식이 만진(프로듀스, 어레인지, 컴퓨터 프로그래밍, 키보드) ‘봄비’에선 원곡을 감쌌던 짙은 현악의 안개를 걷어낸 자리에 말끔한 드럼(김대용)과 명쾌한 샘 리의 기타 솔로가 들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에 쓸쓸하고 격정적인 이은미의 가창이 잘 어울리면서 ‘봄비’는 완전히 새옷을 갈아입는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맡은 ‘미련’도 그렇다. ‘미련’은 전태관의 절제가 가져온 미니멀 리듬으로 세련된 소리 무늬를 뽑아냈다. 여기서 김종진은 한상원과 함께 자신의 뿌리인 기타리스트로서 역할에 충실하다. 특히 페이드 아웃 되는 마지막 기타 솔로는 이중산의 것보다 낫게 들린다.


원곡에 비교적 충실한 김목경의 ‘빗 속의 여인’과 복숭아의 ‘햇님’(기타를 신윤철이 쳤다)도 사운드 질 면에서 원곡에 다가서며 원곡과 멀어지는 발전적 과거 지향을 들려주고 있고, 김광민(프로듀스, 어레인지)이 레게로 비튼 ‘봄’ 역시 알맞게 거듭난 확신의 소리 결정체를 떨군다. ‘봄’에선 구수하고 질펀한 한영애의 창법(그는 1925년에서 1955년까지 우리네 전통 가요를 리메이크 한 앨범으로 나중에 따로 다뤄질 것이다)과 함춘호, 김헌규, 배수연의 철통 같은 세션이 그림처럼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로커(강산에와 윤도현)가 맞이한 신중현이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이 신중현을 다름 아닌 ‘록의 대부’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강산에와 윤도현은 신중현의 음악적 자식들인 셈이다.


먼저 강산에다. 그가 부른 ‘바람’은 원곡을 넘어 원곡보다 더 세차게 뻗어나간다. 노래라기보단 활극에 가까운 강산에의 유쾌한 포효는 원곡의 독특한 발음(‘바람같이 날라~’)까지 그대로 지녀 공허한 허공을 매섭게 찢는다. 강산에의 덩실덜컹이는 퍼포먼스에 합을 맞춘 이들은 다름 아닌 넥스트의 김세황(기타)과 이수용(드럼), 그리고 베이시스트 임현균이다. 여기서 김세황은 솔로 중 신중현의 ‘미인’ 리프를 짧게 인용하며 그러지 않아도 흥겨운 곡에 익살을 더했다.


원곡 자체도 헤비 하드록인 ‘이제 그만 가보자’는 윤도현을 만나 더 또렷해지고 단단해졌다. “또렷하고 단단하다”는 말은 신중현과 윤도현의 차이나는 보컬에도 적용되는 얘기이고, 톤엔지니어 스튜디오의 고종진, 김대성 엔지니어의 솜씨로 다듬어진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드럼의 소리 조화에까지도 맥이 닿는 이야기다. 아마도 윤도현 밴드는 이 헌정을 계기로 ‘한국 록 다시 부르기’라는 자신들의 여정을 기획 했을 터. 그들은 그 앨범에서 강산에가 부른 ‘바람’을 다시 부른 것은 물론 아예 강산에 자체를 따로 해석(‘깨어나!’)하기도 했다.


마지막 곡은 ‘CD Only’로 표기한(물론 지금은 웹에서도 들을 수 있다) 9분 57초 짜리 대곡 ‘아름다운 강산’이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보다 정태춘의 ‘아, 대한민국…’의 정서에 더 깊이 연대하는 이 곡은 김광민의 프로듀스/어레인지(김광민은 키보드와 신시사이저도 연주했다) 아래 강산에, 윤도현, 류금덕, 김바다의 메인 보컬 및 코러스, 최이철과 한상원의 리듬 기타, 이중산과 김광석의 기타 솔로, 김병찬의 베이스, 이철호의 퍼쿠션, 그리고 신대철(기타 솔로)/윤철(피드백 기타)/석철(드럼) 삼형제의 참여로 신중현이라는 존재의 물음표에 느낌표라는 마침표를 찍는다. 새로 만든 ‘아름다운 강산’은 원곡보다 짧은 7분 14초 안에서 요리되었다. 덕분에 긴장감과 몰입감은 더 질기고 기름져 있다. 흡사 신중현의 역사, 그 자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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