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이웃들
런던에는 정통 British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 동유럽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 오신 분들도 많았다)이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다니던 공립학교에는 유대인을 비롯해서,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아이들(영국 학교에 대한 평가 시스템에 그런 비율도 다 공개가 되어 있다)의 비율이 거의 절반 정도에 달하고 있었다.
Year 6였던 첫째는 alone traveller라 해서 부모의 허락 하에 혼자 등하교 하는 것이 허용되었으나, 더 어린 아이들의 경우 보호자(parent or carer)가 등하교 시 동행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Year 3였던 둘째 등하교 때 다른 아이들의 보호자와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1. 내게 먼저 말을 걸어 준 사람은 첫째와 같은 반이었던 일본인 여자아이의 엄마였다. 처음에 그분이 쭈빗쭈빗 영어로 말을 걸어 왔을 때는 한국인인 줄 알고, "혹시 한국분이세요?"라고 물어볼 뻔했는데, 그렇게 묻기 직전 자기가 Japanese라고 소개를 했다. 낯설고 물 선 그곳에서, 같은 동양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참 반가웠다. 그집은 아예 일본에서 영국으로 정착한 케이스였다.
서로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한 후엔 중간중간 하교길에 간식거리를 서로 사 주기도 하고, Half term break(영국의 초등학교의 경우 한 7주 정도 수업을 하고 나면 half term break이라는 1주~2주 정도 방학이 있었다. 즉 9월에 새 학년이 시작된 후 10월 말쯤 1주일간 가을 학기의 half term break, 12월 하순부터 1월 초순까지의 Christmas break, 2월 하순 1주일간 봄학기의 half term break, 4월 2주 남짓 Easter break, 5월 말 6월 초순 1주일 정도 여름 학기의 half term break가 있었고, 7월 말에 학년이 끝나고 9월 새 학년까지 긴 방학이 있었다) 잘 보내라고 작은 선물도 주고받고, 크리스마스 때 담임선생님께 감사카드 말고 작은 선물 같은 걸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른 엄마들은 주로 어떻게 하는지(그 일본인 엄마로부터 그럴 때 10파운드 정도의 슈퍼마켓에서 쓰는 gift card를 주로 선물한다는 걸 알았다) 물어보고 할 때마다 그 일본인 엄마는 참 친절히 대해 주었다. 우리 아이가 7월 학년말에 같은 반 아이들과 했던 뮤지컬 공연에서 피아노도 치고 노래도 하고 여러 활약(?)을 했을 때, 누구보다 큰 박수를 쳐 주며 같이 사진도 찍어주고 하던 친절한 사람이었다. 서로 집에까지 초대하는 플레이데이트까지는 잡아보지 못했지만, 늘 마주치면 푸근해지던 이웃이었다.
2. 우리나라와 달리 아파트촌이 아니라 하우스나 플랏(다세대주택 같은 개념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하우스와 거의 유사하게 생겼다. 다락방 같은 공간을 포함하면 한 7,8 세대가 살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한 건물이다)으로 이루어져 있는 영국 교외 주택가에서, 같은 도로가에 있는 집들은 마당 사이로 아이들이 놀다가 공이 넘나들기도 하고 건물번호가 잘못 기재된 우편물을 서로 전달해 주기도 하는, 그런 이웃이었다.
우리가 살던 플랏에서 세 집 건너서, 첫째 아이와 같은 반이었던 이집트인 자매네 집이 있었다. 그 자매네는 우리집을 거의 제 집 드나들듯 드나들며, 매일같이 우리 아이들과 마당에서, 근처 공원에서 뛰어 놀았고, 무슬림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피자나 치킨을 주로 시켜 주긴 했지만 서로서로 집에 초대하여 식사도 여러 번 같이 했다.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라마단 기간이나, 라마단이 끝나는 Eid 등에 신경을 쓰게 한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 아이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 우리와 함께 하고 싶다며 생일파티를 당겨서 하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서로 놀기로 약속하고 서로의 보호자도 그를 양해하는 플레이데이트는 서로의 집에서 하기도 했고, 공원으로 한 보호자가 데리고 나가서 하기도 했다.
그 아이들이 살던 집은 반지하였는데, 배수로에 문제가 생겨 우리가 런던에 머물 동안 비가 좀 많이 내렸던(런던에 비가 자주 온다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장맛비처럼 내린 날은 기억하기로 딱 하루였고, 대부분 부슬부슬 내리다 그치는 날이 많았다. 그래서 우산을 쓰기보다 우리 동네 런더너들은 대부분 방수되는 후드점퍼 하나로 그냥 다녔던 것 같다.) 어떤 날, 집에 물이 들어오는 참사를 겪고, 아랍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7월 중순에 이사를 갔다. 우리가 8월에 귀국하기 직전에 이사를 간 것이고, 귀국 직전에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었으나 그때 코로나 상황으로 조심조심하느라 얼굴을 다시 못 보고 귀국한 것이 마음에 좀 걸린다.
3. 그 이웃집 이집트인 자매들 외에도 플레이데이트로 우리집에 초대를 했었던 아이 친구들이 생각난다.
한 집은 인도와 스페인 혼혈아로, 그 집의 Spanish nanny는 K pop과 한국음식을 사랑하는, 한국에 몇 번 와 본 적도 있는 친한파였다. 우리집에 왔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랑 우동이 아직도 종종 기억난다며, 요즈음도 연락을 하곤 한다. 그 아이 집 자체는 힌두교 집안이라 역시 또 처음으로, 힌두교에서 안 먹는 음식은 무언지, 드왈리 축제였나 힌두교의 축제는 어떤 의미인지 우리 가족이 찾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또 한 집은 인도인 친구였고, 무슬림이었다. 그 인도인 친구의 nanny는 우리가 있을 동안 두 번 바뀌었는데, 처음 있었던 nanny는 러시아인으로 3월쯤에 central london 쪽에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나중에 온 nanny는 모로코인으로 상당히 활달한 사람이었는데 뭔가 그 아이의 엄마와 갈등요소가 있어 떠났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온 nanny는 스페인 사람으로 얌전한 스타일이었다.
nanny들은 가사 일은 하지 않고 아이들의 등 하교에 동행하고,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인도 계열 아이들이 nanny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고, zoom으로 만다린 중국어를 배우고, 테니스, 구몬센터 수학, 피아노 등 다양한 공부를 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의 특목고와 같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간다는 secondary school 여학교가 우리 동네에 있었는데, 거기 입학생의 대부분을 인도 계열 아이들이 차지했다는 말도 나중에 들을 수 있었다.
또 한 집엔 우리가 초대를 하진 못했는데, 그 집에서 플레이데이트로 초대를 했다. 원래 그 아이들네 부모는 브라질 출신인데 영국에서 정착한 케이스로, Year 6, Year 3, 만 3세(만 3세인 아이를 baby로 표현했더니 그 엄마가 이제 얘는 baby가 아니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인 세 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그 집에선 엄마들끼리 수다를 떨진 않았고, 우리 아이들만 데려다 주고 3시간쯤 뒤에 찾으러 가기만 했었지만, 공원에서 플레이데이트를 할 경우엔 애들끼리 놀게 하고 엄마들끼리 얘기도 하고, 이집트인 친구 집에 놀러 가서 그 엄마와 얘기도 하고, 또 우리집에 온 nanny들과도 얘기하면서, 코로나 시국이었지만 부모들도 그렇게 조금씩 관계를 쌓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