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017.6. 고1 어느 여름 초입 즈음
토요일 아침, 평소와 다르게 나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새어 나왔다. 그 주에 배워 던 것들 중 몰랐던 부분을 급히 체크하고, 과외를 받기 위해 책가방을 챙기고 있는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오늘은 나에게 일 년에 몇 번 없는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학교 시험이 모두 끝이 났고, 주말리그도 없는 날이다. 오늘만큼은 늦잠을 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어도 아빠는 내게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이번엔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엄마가 나섰다.
엄마: 아들~ 늦겠다. 빨리 준비해서 나가자.
나: 응 엄마 잠깐만, 나 이거 입으면 어때? 괜찮아?
엄마: 우리 아들 오랜만에 사복 입은 모습 보니까 멋진데?
커다란 장롱 두 짝 그리고 3단짜리 서랍 3개의 크다면 큰 나의 옷장 안은 온통 운동복으로 채워져 있다. 손 발이 얼어붙을 듯한 날씨를 이겨내기 위한 패팅과 내복 그리고 각종 동계 용품들. 또 다른 한편에는 냄새나는 유니폼들과 훈련복들이 자리하고 있다. 나에게 사복은 사촌 형에게 물려받은 옷 몇 벌이 전부였다.
엄마: 오늘 가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자~
나: 응 엄마. 나 너무 좋은데 피곤하다. 가는 동안 좀 만 잘게.
나는 평소 SNS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곳은 나에게 환상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재밌게 노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나에게 주말은 그저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하는 또 다른 평일의 반복이었으니까"
시합이 없는 날에는 보통 운동장에 나가서 아빠와 개인 운동을 했다. 아빠는 나에게 항상 너만의 특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직접 나를 코칭하며 멀리 날아간 공을 주으러 다니셨다. 훈련이 끝나면 나는 곧장 정반대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책가방을 매고 일반 학생들과 함께 수학과 영어 수업을 들었고, 주말 시합이 있는 날에는 씻지도 못하고 땀에 젖은 유니폼을 입은 채 수업을 들으러 갔다.
엄마: 엄마가 오늘 돈 좀 썼다. 어때, 마음에 들어?
나: 고마워 엄마. 근데 이거 입을 날이 있을까...? ㅋㅋㅋ
나: 쇼핑했더니 배고프다. 엄마 샤브샤브 먹으러 가자.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이었다. 오늘만큼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 해방감을 나는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엄마는 항상 나를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아빠에게 크게 혼난 날에는 나를 위로해주기도, 내가 정말 잘한 날에는 같이 기뻐해 주기도, 나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엄마가 자처한 엄마의 역할이었다.
나: 엄마, 나는 아빠가 너무 나한테 강하게 대하는 거 같아. 엄마도 보면 가끔 무섭지 않아?
엄마: 그렇지. 엄마도 가끔 너무하다 싶을 때가 많이 있더라.
근데 아빠 너무 미워하지 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나: 아 그거야 당연히 알지.... 내 말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 엄마가 꽤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가 원래 죽으려고 했어.
꿈에서도, 세상 어디에서도 상상해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나: 아니.. 그게 무슨 얘기야.. 아빠가 죽으려고 했다니...
엄마: 네가 막 축구 시작할 때 아빠 하는 일이 크게 잘못됐었어.
우리 아빠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 좋은 집에 좋은 차를 타고 다녔고, 나 역시 무언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걸 다 해오며 부족함 없이 살아왔었다.
그런 아빠가 망했을 줄이야...
엄마: 벌써 그렇게 된 지 5년이 됐네. 이제 너도 컸으니까 엄마가 말하는 거야.
너 축구하러 가고 나서 아빠 일이 잘못돼서 무척 어려웠지.
맨날 전화 오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니까 엄마도 무섭더라. 다시 못 일어날까 봐.
그래도 그동안 엄마가 이리저리 모아놓은 돈으로 너 옷 사 입히고 회비랑 원비 보탠 거야.
나는 지난 5년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엄마와 아빠는 내 앞에서 철저하게 숨겼왔 던 것이었다. 허구한 날 유행하는 운동복 사달라고 조르고, 힘들다고 징징대었던 나의 과거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엄마: 으휴, 아빠랑 좀 싸웠는 줄 알아. 맨날 돈 없다고 엄마한테 빌려 달라고 하는데... 맨날 엄마가 없다고 조금씩 줬거든. 너희들이 있으니까. 근데 지금은 후회가 되네. 믿을 건 엄마뿐이었는데... 많이 미안하더라고.
이건 꿈이었다. 아니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나:...............
엄마: 그러면서 아빠가 그러더라고. 이제 더 이상 앞이 안 보이고 너무 힘드니까 다 정리하고 싶었다고.
그래서 너 몰래 마지막으로 네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러 간 적이 있대.
아빠는 수천번도 더 생각했을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와 있는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문자들. 가장으로서 버텨야 하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릎이 꿇린 채 또 버티고 버텼을 것이다.
엄마: 근데 조그만 한 놈이 축구 한번 잘해보겠다고 어찌나 열심히 하고 있다던지... 그 모습을 보고 그런 널 놔두고 갈 수가 없었대.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 엄마도 그때는 몰랐지.
엄마: 그때 아들이 정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아빠가 지금까지 이겨내고 온 거야.
아빠는 네가 강하게 크길 바라셔. 아빠 같은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너도 포기하지 말고 이겨내기를 원해서 아들에게 그렇게 강하게 대해 왔던 거야.
속에서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미친 듯이 뜰 끓어올랐다.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난 그날부터 바뀌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