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나를 신뢰하기 때문에 부탁한다고 생각했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두 다 해결해주고 싶었다. 누군가 한 개를 부탁하면 열 개를 더 도와주려는 그런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모든 것을 내가 다 해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 있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부탁한 일들을 못 했을 경우 초조해지고 점점 압박감이 밀려오기도 하고, 완벽하게 하지 못하면 스스로 자책하게 되고, 상대에게도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거절하는 방법을 조금씩 연습했다. 서로가 기분이 나쁘지 않도록 거절하는 연습.
내가 평소에 자신 있게 잘 할 수 있는 일이나 금방 끝낼 수 있는 것들은 부탁하면 잘 들어주는 편이다. 이미 여러 번의 경험이 있고 즐기면서 할 수 있다면 그런 부탁은 오히려 고마울 때도 있다. 특히 새로운 정보를 공유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좋아한다. 누군가 부탁하지 않아도 먼저 손을 내민 적이 많다. 하지만 내가 겪어보지 않았던 일들, 시간이 정말 많이 필요한 부탁은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혹시나 실수할 수도 있고 나로 인해 피해를 입히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15년 지기 대학교 동기 언니를 만나 얘기를 하다가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관대하고 포용력이 넓은 편이지만, 이성 관계에서는 선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고백부터 단칼에 거절했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를 좋아하고 신뢰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들어주는 편이 아니었다. 가치관이 뚜렷한 사람이었고,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면 조금씩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방의 반응이 어떠할지라도 내 마음을 전달하고 다가가기도 했다. 부탁도 마찬가지다. 거절하는 방법이 조금 서투를 뿐, 내 마음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조금 더 지혜롭게 거절하는 방법을 찾아보고, 부탁하기를 어려워하는 내 모습도 바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