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 청년은 예뻤다. 2

청년 그후,

by injury time

그 청년을 다시 만난 건 일주일 후 자격증 시험장이었다. 종강 때까지 그 젊은이한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헤어진 후, 장마가 시작되어 수시로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가 쏟아질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그를 소환해냈다.


일주일 후, 수원의 어느 고등학교 시험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나는 꽤 일찍 시험장에 도착하여 오랜만의 쫄깃한 긴장감을 다스리고 있었다. 내 자리는 뒷문 맨 끝자리였다.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에 그 청년이 휩쓸려 들어왔다.


엇, 그다!


그는 여전히 예뻤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내 앞에, 앞에 앉았고, 잠시 후 시험 시작이다.

시험은 한 시간씩 한글, 엑셀, 파워포인트 순으로 3번에 걸쳐 치러진다. 첫 시험은 한글이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타다닥탁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시험시간 60분을 꽉 채워 겨우 3페이지 문항을 완성해내고 종이 울렸다. 다음 시험까지 20분을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

그가 먼저 벌떡 일어나 커다란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나도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저기요, 오랜만이에요

- 어, 안녕하세요? 여기서 시험 보세요?

- 네, 그쪽 뒤에 뒤에 앉아있었어요


청년과 나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걷고 있었다.


- 커피 한잔 하실래요?


눈앞에 자판기를 가리키며 그가 동전을 꺼냈다.


- 그럴까요


커피를 한잔씩 들고 우리는 근처 벤치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는 시험 잘 봤냐는 통상적인 주제로 어색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웬일인지 캐주얼 드라마에 나오는 실력 있는 여자 실장님 같은 경쾌한 목소리로 그와 함께 했다.

그리고 2교시 후 쉬는 시간도 그와 함께 시간을 때우며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최바름, 지금은 청년실업급여를 받고 있고 아직 뭐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처럼 보였다. 해맑게


- 돈 많이 벌고 싶어요


했다. 우리 아들이랑 같은 뇌를 갖고 있다.


- 시간 되면 점심 같이 먹어요

-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드디어 그를 내 차에 태우는 데 성공했다. 나는 갑자기 바빠졌다. 차에 타기 전에 얼른 화장실로 가서 원피스 안에 입고 있던 속치마를 벗어 쓰레기통에 구겨 넣어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쇄골이 보이게 셔츠형 원피스의 단추를 세 개나 풀어헤쳤다. 쉬폰 원피스 안으로 치골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유난히 작은 스킨색 팬티만을 입은 채 가볍게 운전석에 앉았다. 속치마가 그렇게 무거웠었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양옆이 무릎까지 터진 원피스는 운전석에 앉으니 자연스럽게 허벅지까지 뽀얀 살이 드러났다. 나는 평소에 유난히 다리를 모으고 운전하던 습관이 있었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힘을 풀고 다리를 약간은 벌린 채 편안 자세로 악셀을 밟아갔다.

그는 여전히 예쁘고 고운 목소리로 내 차에 올라탔고 나는 미리 검색해 놓은 근처 맛집으로 향했다. 청년은 오늘, 검은색 파타고니아 티셔츠에 7부 린넨 바지를 입고, 맨발에 새하얀 반스 단화를 신고 있다. 청년은 다소곳이 안전벨트를 하고 무릎에 두 손을 올려놓고 여차하면 도망가리라 마음먹은 여학생처럼 긴장하는 듯했다. 이십 대에 혼자 외딴 여행지에서 어떤 아저씨 차를 얻어 타고 숙소까지 갔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내가 저렇게 90도로 불편하게 앉아 무릎에 두 손을 올리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도망가야지 했었었던 것 같다.


- 로제 떡볶이 먹어봤어요? 이 근처에 그거 맛집이 있더라고요


청년은 안 먹어봤다고 했다. 청년과의 대화는 내가 거의 주도해야만 했다. 그는 마치 처갓집 사돈의 팔촌 이모를 대하듯 한없이 나를 어려워했다. 나는 그럴수록 그가 답변하기 쉬운 질문들을 생각해냈다.


- 군대는 아직 안 갔죠?

- 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갔다 왔어요

- 와, 좋겠다. 그래, 갈 거면 빨리 갔다 오는 게 좋아요

- 네,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해요


그도 남자라고 군대 얘기를 하니 긴장이 풀렸는지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놓았다. 웬일인지 부드럽고 포근한 빨간 사과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차 안에 가득했다.


맛집은 대기가 조금 있었지만 기다리는 내내 각자의 식성 이야기를 하며 기분 좋게 시간이 갔고, 로제 떡볶이는 대만족이었다.

그리고 브런치에 름씨 글을 올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신기한 듯 작가냐고 묻는다.


- 아니에요, 그냥 글 써서 올리는 거예요. 검색창에 검색하면 나와요

- 어떻게 찾아요?

- 원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데 바름씨는 뭐, 이제 안 볼 사이니까 알려줄게요. 예전에 버스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을 썼어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 작가명을 불러줬다. 그는 내가 피클 한쪽을 씹는 사이, 금세 포털에서 나를 찾아냈다.


- 어, 진짜 있어요!


그는 마치 오래된 친구를 앨범에서 찾아낸 아이처럼 핸드폰 화면을 내게 들이밀었다.


- 어, 지금 보지 마요. 나중에 봐요. 그냥 그날 너무 예뻐 보여서 그때 쓴 거예요. 오해는 하지 마세요


나는 구차하게 내 마음을 들킬까 봐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식사는 즐거웠고, 물어볼 말도 해줄 말도 많아서 내가 뭐라고 횡설수설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아직 꿈이 없고, 좋아하는 건 돈이 안되니 할 수가 없다고도 하고, 잘하는 건 없는 거 같다고도 했다. 그래도 여행과 책 읽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 반가웠다.


- 뭐든 해봐요. 좋아하고, 잘하는 게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걸 깨닫게 되고, 름씨도 모르게 그걸 하고 있을 거예요.


20년도 넘은 세월을 먼저 살아낸 '으른'으로서 나는 그에게 희망적인 덕담을 하며 그와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며칠 후, 낯선 사람에게 카톡이 왔다.


- 선생님, 저 바름이에요. 가끔 연락해도 되지요?


청년은 전에 내 연락처를 차에서 발견하고 저장했다고 했다. 뜻밖의 연락에 나는 다시 그 젊은이를 생각해냈고 반가웠고,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바다 같은 넓은 마음이 화수분이 되어 솟아났다.


나는 요즘 매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그가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며 운동을 하고, 피부관리를 하고, 아래위 속옷을 세트로 맞춰 입고 있다.

오늘 새벽에 누군가가 구독을 했다. 구독자가 한 명도 없는 어느 신입 작가가 내게 구독신청을 했다. 그 작가의 글들을 살펴본다. '그녀는 예뻤다'의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어떤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keyword
이전 06화그 청년은 예뻤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