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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웅진 Aug 17. 2024

임오관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당선작  <조선  활자공  임오관,  평화를  만들다>


“할아버지, 이 책이 전조(前朝: 고려) 때 묘덕 스님께서 만드신 책이죠?”


대여섯 살 먹은 댕기 머리 소년이 표지가 누렇고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는 제목이 까맣게 적힌, 상투가 새하얀 할아버지가 든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조그마하고 호기심 많은 손자의 질문을 받은 할아버지는 굳은살이 박이고 화상 자국도 있는 오른손으로 그 책의 표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 손자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처럼….


“그렇단다, 오관아. 묘덕 스님께서 이 할아비나 네 애비와 같은 인쇄공들에게, 그러니까 네 증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 그러니까 선조님께 의뢰해서 만드신 『직지심체요절』이지. 100여 부를 찍으셨다더구나. 그중 하나를 우리 집안이 받아서 이렇듯 대대로 물려온 거란다. 묘덕 스님께서 선조님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때 원하는 걸 말하라 하셨거든. 그랬더니 선조님께선 이걸 달라 하셨다지 뭐냐.”


“왜 쌀이나 베 말고 이걸 달라 하셨어요?”


오관은 작은 댕기 머리를 갸웃거렸다. 어머니가 매일매일 아침거리와 저녁거리를 준비할 때마다 쌀이나 베가 더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고 푸념하는 게 떠올라서였다.


할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글쎄다. 이 할아비도 그것이 알고 싶어서 예전에 아버지께, 그러니까 네 증조할아버지께 여쭤봤단다. 지금 너처럼 말이다. 증조할아버지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을 모르겠다고 하셨지. 다른 인쇄공들은 쌀이나 베를 받은 걸로 안다고 하시긴 했는데…, 왜 그러셨는지는 딱히 깊이 생각해 보신 적이 없다고 하셨어. 이에 증조할아버지와 이 할아비의 대화를 들으신 네 고조할아버지, 그러니까 이 할아비의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하여 목구멍을 가다듬은 다음 점잖게 말을 이었다.


“선조님께서 당신이 얼마나 큰일을 하셨는지를 나랑 오관이 너 같은 자손들에게 알리려고 그러셨다고 하셨지. 네 증조할아버지한테도 진작 말씀을 해주셨는데, 증조할아버지는 그걸 잊었다며 타박까지 하시면서….”


할아버지는 당신 아버지가 혼이 나던 모습이 떠올라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오관아, 전조 때 다른 인쇄공들이 받았던 쌀과 베는 지금 흔적조차 없지 않느냐. 물론 다 먹거나 헤졌으니까 없어졌겠지만…, 쿨럭! 쿨럭!”


“그래도 쌀이나 베로 받았다면 한동안 상당히 잘 먹었을 텐데요.”


어린 손자가 크게 아쉬워하자 할아버지는 ‘벌써부터 집안 살림을 걱정하니까 기특하다’는 마음에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설명했다.


“그런데 네 고조할아버지 말씀이, 선조님께선 묘덕 스님이 그렇게 많은 쌀과 베를 가지신 것 같지는 않다고… 보신 것 같다는 게야. 그러니까 고조할아버지도 선조님의 마음을 짐작만 하셔서… 이 할아비한테 말씀하신 거겠지. 아무튼 눈치가 빠른 만큼 착하셨던 선조님은… 이 귀한 책을 쌀이나 베 대신 받으신 거 아니겠느냐고… 고조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단다, 쿨럭! 쿨럭!”


이 이야기에 오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선조님은 마음 씀씀이가 깊으신 분이셨구나!’


오관은 이 순간 자기가 하기로 마음먹은 큰일을 할아버지에게 털어놨다.


“할아버지, 저도 말이지요, 이 책을 만드신 선조님처럼 아주 훌륭한 책들을, 아주 귀한 책들을 만들 거예요! 이 책처럼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줄,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책들을 인쇄할 거예요! 묘덕 스님께서 이렇듯 귀한 책을 고맙다며 쥐어주셨을 정도로 대단하게 여기신 선조님이 하신 것처럼요!”


노인은 이렇듯 기특한 손자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격려했다.


“그래, 우리 오관이가… 훌륭한 인쇄공이 되는 날에, 쿨럭! 쿨럭! 이… 이… 이 할아비가 이 책을 물려… 주마, 쿨럭! 쿨럭!”


“예, 할아버지! 반드시 선조님 같은 훌륭한 인쇄공이 돼서 이 책을 물려받을게요! 이 임오관, 반드시 조선 최고의 인쇄공이 될 거예요!”


제 포부를 힘차게 드러내며 잔뜩 들떠 있던 어린 임오관의 눈에 할아버지의 기침이 아주 심해진 건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때 임오관은 위대한 인쇄공이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 제 모습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부터 할아버지는 잠자리에서 영원히 일어날 수 없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 유물 https://smart.science.go.kr/scienceStory/view.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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