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전업 주부가 되는 여자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삶을 1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나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철저한 원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일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행위를 하게 될 당위성 같은 건 없다고.
15년 간 밥 먹고 이 짓만 해왔는데도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게 말이 될까.
하지만 답답하게도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숱한 사건이 회오리처럼 휘몰아쳤고, 그 안에서 한번 정신을 놓아 버리니 길을 잃고 사정없이 헤매기 시작했다. 왼발 다음이 오른발인지, 두 팔을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언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보같이 앉아 있었다. 이유도 모른 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굳이 외근을 잡아 사무실을 나섰다. 늘상 오가던 한남대교를 건너며 한강을 바라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서 그냥 뚝 떨어져 죽으면 어떨까.
그냥 ‘지쳤다’는 생각뿐이었다. 힘을 내기는커녕, 지금 내 마음이 왜 이리 힘든지 설명할 작은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갈 수 있겠지. 마음에 썩 들진 않더라도 그저 그렇게 적당히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어쩌면 방법을 몰라서라기 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지쳐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이 문제였다. 한번 들어온 쓸데없는 생각은 텅 빈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외근을 마치고 다시 강을 건너 돌아오며, 내가 갈 데까지 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난 한 발자국도 갈 수 없기에 지금의 발버둥이라도 멈춰야 했다. 사무실로 돌아와 노트북의 모든 문서를 정리했다.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굳히며,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유용한 자료들(회사에 인계하지 않아도 되는)을 모두 지워버렸다. 지금까지 이뤄온 것이 너무 아깝지 않냐며 끝까지 내 손을 잡아주는 상무님에게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최대한 담담하게 사장님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뜻을 밝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위의 물건을 말끔히 정리하고 마치 내일도 출근할 사람처럼 조용히 마지막 퇴근을 했다.
그 동안 오랜 시간 여러 일을 겪으며 만약 내가 이 회사를 그만둔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많이 상상해 봤다. 하지만 한 번도 이런 모습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오늘이 마지막인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박수도 아쉬움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도망쳤다. 답이 없는 현실로부터…
도망치듯 회피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모두가 내게 지금까지 이뤄 온 것들이 아깝다고 했지만, 사실 난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에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버거운 현실을 내려놓았을 뿐.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에 들어온 나는 그날도 아이를 돌보느라 지쳐 있는 친정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퇴사했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잠시, 엄마는 그로부터 30분 만에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첫 아이를 낳고 거의 5년이 넘게 우리 집에 상주하며 지내셨던 엄마였다. 내가 회사를 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도망치듯이… 마치 지금이 아니면 탈출할 수 없다고 느끼기라도 한 듯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가 떠난 자리 뒤로 오늘 처음 전업맘이 된 내가 서 있었다.
전업맘은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