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약속 & 아빠의 약속
남편의 해외연수로 우리 가족은 미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남편이 한국에서 하던 일을 쉬고 해외의 연구소에 다니게 되면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느라 바쁜 아빠의 부재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던 우리 가족은,
미국에 나와 일상에서 아빠의 존재가 얼마나 빛나는지 흠뻑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새로 생긴 여유가 기쁘면서도 동시에 힘들었던 거 같아요.
남편의 상황을 100% 이해합니다.
아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들의 산만함과 충동성에 피곤함이 쌓인 것 같습니다.
요 몇 주간 계속 표정이 안 좋더니 급기야 아들의 언행을 지적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특히 '바다'가 여동생과 싸울 때, 저녁에 약효가 떨어져 목소리가 커질 때...
거실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지난 주말.
바다와 여동생이 티격태격 했고.
아빠는 표정이 굳었어요.
"너는 동생이 만만하냐"는 아빠의 지적에 바다는 억울하다며 폭발했어요.
'때가 왔구나' 싶었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맞추기 위해
아빠와 아들이 마주 앉아야 할 때 말입니다.
바다가 기분이 가라앉은 뒤 전후 사정을 물어봤습니다.
바다는 아빠가 자신을 자꾸 지적하고 여동생 편을 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평소에 제게 아이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신경에 거슬린다 했고. 동생을 자기 맘대로 움직이려 드는 걸 고쳐야 한다고 했었기에
각각 느끼고 있던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중간 어느 지점에서 조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일단, 남편과 바다 각자 느낀 감정에 대해 저는 '판단'하지 않고 수용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제안했습니다.
"바다야. 네가 억울한 마음 알겠어. 엄마가 아빠 얘기도 들어봤거든. 엄마가 보기엔 너와 아빠가 둘 다 현재 답답한 상태야. 둘이 얘기를 해보면 좋겠어. 이 집에서 다 같이 잘 살기 위해서는 각자 한 발씩 양보를 해야 하잖아. 네가 아빠에게 요구하고 싶은 게 있니?"
"나는 아빠가 날 지적하는 걸 줄이고, 날 지적하기 전에 어떻게 된 일이니?라고 물어보았으면 좋겠어."
"그래 그럼 우리 안 까먹게 써놓자."
저는 흰 종이를 반으로 접어 왼쪽엔 '아빠의 약속' 오른쪽엔 '바다의 약속'이라고 적었어요.
그리고 내일 아빠랑 이야기하기로 약속했죠.
다음날 오후.
아빠와 바다가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동생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어요.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산책을 끝내고 돌아오니
<아빠의 약속>
'지적을 줄이기'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
"기분이 안 좋을 때 말로 표현하기"
<바다의 약속>
'목소리 줄이기'
'짜증과 화가 날 때 말로 표현하기"
"시간 약속을 최대한 지키기"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합의에 잘 이르렀는지
둘 다 표정이 홀가분해 보였습니다.
대화를 나눈 남편과 아들 바다가 고마웠습니다.
바다는 아빠가 힘든 지점을 알았을테고,
남편은 아들이 억울해하는 지점을 이해하게 되었을 겁니다.
가족은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불편한 점은 말로 표현하고, 가능한 선에서 수용하고 한발 양보할 수 있다면
한결 지내기 편할거에요.
이 과정을 반복하며 가족은 자신의 경계를 알아채고, 상대방의 경계 또한 지켜주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둘의 약속이 하루 아침에 물 흐르듯 잘~ 지켜지진 않겠지요. 완벽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도 남편과 아들은 분명 어제와 다른 관계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앞으로도 갈등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대화를 시도해 보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고
서로 배려하고 양보할 수 있다는
걸 알아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남편이 말했습니다.
"바다랑 얘기해서 약속 정한 거 효과가 있는거 같아. 일단 기분이 안좋을 때 말로 표현하니까 감정이 조절되는 효과가 있어."
남편의 말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나 모릅니다.
감정조절의 절대 원칙 1번은
감정에 이름을 붙여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바다가 세운 약속에 각각 '감정을 말로 표현해달라'는 항목이 있습니다.
둘이 얘기해서 만든 항목이에요.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계속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분명 방법은 있고, 우리는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