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 꿈의 목소리
건물은 오래된 듯, 그러나 이상하게 낯익었다. 어린 시절 음악 학원으로 다니던 그곳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계단, 벽에 남아 있는 희미한 포스터, 누군가의 서툰 손글씨로 적힌 ‘발표회, 오후 7시’. 나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피아노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 이 건물은 폐허나 다름없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낡은 피아노가 놓인 작은 강당이 나타났다. 무대 조명은 오래전에 꺼졌지만, 창문 틈으로 들어온 달빛이 건반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끝을 건반 위에 얹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음, 그러나 더는 낼 수 없다고 생각했던 소리. 그 순간, 문득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점점 선명해지더니 결국 나의 과거로 모습을 바꾸었다.
빛나는 눈빛, 아직 상처를 모르는 얼굴, 무대를 향해 서슴없이 걸어가던 그 시절의 나.
“너는…” 나는 속삭였다.
그는 미소 지었다. “잊어버렸니? 네가 가장 사랑했던 순간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끝났어.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어.”
과거의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물었다.
“아무도? 아니면 네가 스스로 귀를 막아버린 건가?”
나는 불편한 듯 자리에 몸을 기울였다.
“넌 몰라. 무대 위에서 외롭게 노래하던 심정을. 박수 소리는 잠깐뿐이었고, 돌아오는 길엔 늘 공허함뿐이었어. 결국 현실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
그는 내 말을 잘라내듯 대답했다.
“현실이 아니라, 네가 나를 버린 거야. 네 안의 불씨를 스스로 꺼버렸지. 실패가 무서워서, 다시 상처받을까 두려워서. 그게 진짜 이유 아니야?”
가슴 깊은 곳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나는 억지로 반박했다.
“너는 단순했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아. 재능만으로는 안 돼. 돈도, 인맥도, 운도 없는 내가 무슨 희망이 있었겠어?”
과거의 나는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한때 나의 전부였다.
“희망이 없었다고? 아니야. 네가 단지 끝까지 가지 않았을 뿐이야. 벽은 언제나 있었어. 하지만 그 벽을 넘으려는 순간, 진짜 너는 빛났어. 그때 네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살아 있었어.”
말문이 막혔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 커튼이 크게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먼지 입자가 반짝이며 흩날렸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건반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시 노래한다 한들, 이미 모든 건 지나갔어.”
과거의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건반 위에 손을 올리더니 단 하나의 음을 눌렀다.
낡은 피아노에서 흘러나온 그 소리는 놀랍도록 맑고 투명했다.
공기 속에 울려 퍼진 순간, 내 심장은 잊고 있던 박동을 되찾는 듯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봐. 아직도 살아 있잖아. 목소리는 죽지 않았어. 네가 여전히 숨 쉬고 있는 한, 노래는 너와 함께할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까지 도망쳤던 것은 세상도, 사람들도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꿈의 목소리는, 과거를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다시 시작하라는 부름이었다.
그날 새벽, 나는 건물을 나와 오랜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새벽별이 떠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더 이상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겠다. 언젠가, 이 노래를 세상 앞에서 다시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