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소리

12화 — 죽은 자의 목소리

by 나리솔

12화 — 죽은 자의 목소리




밤은 유난히 깊고, 침묵은 뼈아플 정도로 고요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의 초침이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조차,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거대한 울림으로 다가왔어. 책상 위에 놓인 책은 마치 스스로 생명을 얻은 듯, 하릴없이 펼쳐져 열두 번째 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지. 그 위에 새겨진 글자 한 자 한 자가 차가운 비석처럼, 혹은 단단한 바위처럼 느껴졌어.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지만, 여전히 너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단다."

그 글귀를 읽는 순간, ... 심장이 발끝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리는 것 같았어. 의자에 앉은 채로 손끝이 후들후들 떨려왔지. 그 목소리는 마치 깊은 우물 속에서 길어 올린 것처럼 낮고, 차가운 강물처럼 서늘했어. 살아있는 사람의 따스한 숨결이 아니라, 어딘가 아득한 곳에서 건져 올린 '기억'의 메아리 같았달까.

"설마... 이게 대체...?" 나는 혼잣말을 뱉었지만, 이내 모든 것을 알아챘어.
그건,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내 아버지의 목소리였던 거야. ㅠㅠ

어릴 적, 아버지는 늘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툴렀지. 입가에 미소 한번 쉽게 띄우지 않는 분이었어. 난 그분의 깊은 침묵 속에 숨어 있는 마음을 끝내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사춘기 시절에는 마치 가시 돋친 말처럼 날카로운 말들로 그를 밀어내기 바빴어. 그렇게 갑작스레 아버지는 이 세상과의 인연을 놓아버렸고, 나는 영원히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었지.

그런데 지금, 이 낡은 책 한 권이 그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벽을 와르르 무너뜨리고 있었어.

"나는 네게 너무나 많은 말을 전하지 못했구나. 언제나 일에 지쳐 있었고, 마음을 표현하는 일엔 한없이 서툴렀지. 하지만 꼭 알아주길 바랐단다. 내가 너를 그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다는 것을."

... 이 대사 드라마에서 나오면 진짜 오열할 각... 나는 눈을 질끈 감았어. 잊었다고, 애써 외면했다고 생각했던 모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지. 정답게 마주 앉았던 저녁 식탁의 온기, 투박하지만 늘 따스했던 국 한 그릇, 어색하게 뒤늦게 돌아와 미처 건네지 못했던 생일 선물... 그 모든 사소하고 평범했던 장면들이,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서 살아 숨 쉬듯 선명하게 되살아났어.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를 용서하길 간절히 바란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네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었던 감정은, 원망이 아니었단다. 그건, 늘 너를 향한 '사랑'이었음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어. 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책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지. 어쩌면 우리는 죽은 자의 목소리를 영원히 들을 수 없기에, 살아있는 동안 더 귀 기울여야 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인간은 왜 늘 그 반대로 행동할까? 가까이 있을 때는 침묵하고, 떠난 후에야 비로소 후회의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걸까...

방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지만, 내 안에서는 새로운 감동의 울림이 시작되었어. 죽은 자는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어. 살아있는 나의 기억과 사무치는 후회 속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나를 다정하게 부르고 있었던 거야.

책의 마지막 줄이 내 눈에 또렷하게 들어왔어.

"죽은 자의 목소리는 삶의 가장 큰 가르침이 된다."

나는 책을 조용히 덮고,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었어.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받아들였어.
그리고 동시에, 그 부재 속에 여전히 존재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지.

오늘은 열두 번째 날이었어.
그리고 나는 깨달았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목소리가 시작되는 새로운 여명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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