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화 — 잊힌 목소리
아침 공기는 평소보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창문을 열자 낡은 커튼이 천천히 흔들렸고, 바람은 먼지와 함께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실어왔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은 이미 열한 번째 장을 펼치고 있었다. 흰 종이 위에 새겨진 문장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서 묘한 울림이 번졌다.
“너는 왜 나를 잊었니?”
나는 숨을 고르지 못했다.
그 한 문장이 방 안의 모든 소리를 삼켜 버린 듯했다. 순간적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 묻어 두었던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도, 가족도, 친구도 아닌… 더 흐릿하고, 더 아득한 목소리였다.
“기억 안 나? 나는 늘 네 곁에 있었는데.”
낯설고도 친숙한 울림이 귓가를 스쳤다. 그 목소리는 멀리서 오는 메아리 같았고, 동시에 바로 곁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나는 방을 천천히 걸어 다니며 기억을 더듬었다. 발밑의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조차 과거로 이끄는 길처럼 들렸다.
그리고 문득,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 교실의 구석. 늘 혼자 앉아 있던 아이.
이름조차 뚜렷하지 않다. 교과서 가장자리에 작게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던 모습,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뒷모습. 가끔은 용기를 내어 나를 불렀지만, 나는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바쁘다는 핑계, 어색하다는 이유로, 늘 모른 척 지나쳤다.
“…설마, 너였니?”
순간, 목소리가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나야. 너는 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지. 나는 네게 대단한 것을 바란 게 아니었어. 그저 대화 한마디, 눈길 한 번이면 충분했을 텐데… 너는 끝내 나를 보지 않았지.”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은 칼처럼 내 안을 깊게 찔렀다. 내게는 사소한 무심함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무심함이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을 수도 있다.
“네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순간이, 내겐 전부였어.”
목소리는 더 이상 원망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다만 오래된 슬픔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얼굴을 감싸쥐며 앉았다. 인간은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 존재인가. 수많은 얼굴과 시간을 지나며, 마음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워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잊힌 쪽에게는 그 시간이 그대로 남는다. 잊힌 사람은 그 순간 속에 멈춰 선 채로 살아가야 한다.
“…미안하다. 그땐 너무 어려서, 네가 내민 손길을 알지 못했어. 그리고 나는… 내 삶을 핑계 삼아 도망쳤지.”
책의 문장이 다시 번져 나왔다.
마지막 줄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잊힌 사람은 없고, 잊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나는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보며 움직이지 못했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 사라졌다고 믿었던 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외면했을 뿐이었다.
창문 밖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나를 현재로 붙잡았지만, 동시에 과거의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속으로 다짐했다.
다시는 누군가를 그렇게 잊은 채 지나치지 않겠다고.
오늘은 열한 번째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과연 나는 몇 사람이나 잊어버린 채 살아온 걸까.
그리고 내 목소리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또 잊혀지고 있는 건 아닐까.